이 책은 이봉창의 이야기 인데 다른 이봉창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과는 다르게 이봉창의 업적을 영웅의 신화처럼 미화하지 않고 독립운동가가 아닌 인간 이봉창 으로서의 삶을 말하기 위해 쓰여 졌다.
본문일부/목차
먼저 ‘기노시타 쇼조’ 이봉창의 일본이름이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었는데 첫 번째 로는 창씨개명 전에 친일파들이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미리 알아서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한 경우가 있고 두 번째로는 일본에서 취직을 하기위해 이름을 바꾸었다. 이봉창의 경우는 취직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봉창은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일본의 향락문화, 자본주의소비문화를 즐기는 ‘모던보이’였다. 우리가 예상했던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또 이봉창은 어린 시절에 용산에서 태어나 살면서 아버지가 건축사업을 하면서 유복하게 자랐고, 아버지가 어머니와 형과 자신을 버리고 떠나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조선내일본’이라고 불리며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고 살았던 용산에서 자랐기에 3.1운동이나, 민족운동과 아무런 상관없이 식민지의 아픔을 느낄 수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봉창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식 이름을 쓴 것도 일본의 차별 때문이었는데 취직을 해서 같은 기간을 더 열심히 일해도 승진이 일본인이 더 빨랐고 돈도 더 많이 받았다. 심지어 늦게 들어온 모자란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승진을 더 많이 했다.
이봉창의 성격은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고 남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별을 참지 못 하고 용산 역에서 퇴직을 했다. 관절염을 핑계로 대어 받은 퇴직금을 유흥비로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 후 이봉창은 1924년 문화통치시기에 청년회를 조직했다. <금정청년회>이다. 이 단체는 조선총독부에 협력적인 단체였다. 주로 지역치안과 계몽활동, 국세조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에 불만을 품고 용산 역에서 퇴직을 하기는 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서 식민지정책에 협조했다. 그러던 중에
이봉창이 일본으로 간 이유는 일본에 가면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을 거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가서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조선인이라서 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국 오카다 상회라는 곳에서 첫 취직이 되어서 열심히 일했으나 월급을 받지 못해 그만두고 가스회사에 취직한다. 그 곳에서 경리가 부르기 좋게 ‘기노시타 쇼조’로 이름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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