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쏠(투자할) 곳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인물이 안 보입니다.” 모 벤처캐피털업체 대표의 최근 벤처투자 부진 요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는 벤처캐피털 업계 전체의 고충이기도 하다. 벤처 생태계의 한 축인 벤처캐피털 업체가 벤처기업 투자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보는 것은 그 회사 대표(CEO)다. ‘벤처’라는 조직이 기술 이해가 큰 대표 1인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고, 또 대표 주도로 기술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당수 벤처캐피털 심사역들은 ‘회사가 보유한 기술에 앞서 대표를 우선적으로 본다’는 말을 한다. 정보통신부 장관 출신으로 벤처캐피털 업체에서 활동 중인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도 최근 “투자 결정의 50%는 대표의 자질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털 업계가 찾는 투자희망 벤처 CEO는 기술에 대한 이해가 풍부하고 충분한 연구경험이 있는 인물이다. 대학·연구소·기업 등에서 경력을 쌓은 전문가다. 이들이 ‘우산’으로 비유되는 조직에서 나와 본인의 책임하에 기술개발 및 사업화에 뛰어든 곳이 가장 벤처기업답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들이 창업에 성공한 사례는 많다. 대기업 분사창업의 경우만도 NHN이 1997년 삼성SDS의 사내벤처로 시작했으며, 쏠리테크도 1998년 한국통신 사내벤처 1호였다. 그러나 최근 이 같은 이력을 지닌 벤처 CEO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교수와 연구원, 기업인 창업 열기가 크게 식었다. 벤처기업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교수·연구원 창업 벤처기업은 최근 수년간 계속 줄고 있다. 1999년 973개사였던 교수·연구원 창업 벤처기업은 2004년 3144개사까지 늘었으나 이후 감소세를 보이며 2008년에는 1555개사까지 줄었다. 2004년 벤처기업 수가 7967개사에서 2008년 1만5401개사로 두 배가량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교수와 연구원 벤처창업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술자들이 창업에 관심이 낮은 것은 독립에 따른 리스크(위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한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로 이어진다. 이 같은 현실이 이들을 과감히 창업에 뛰어들게 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 이민화 기업호민관은 “벤처창업을 하지 않는 것은 과거 벤처의 학습 효과 결과”라며 “벤처에 도전했다가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것을 보고 창업에 나서지 않는다”고 단정했다. 대안은 전문가들이 실패 부담을 떨치고 성공신화에 도전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 정착이다. 지난달 방한한 이명박 대통령 국제자문위원인 루벤 바르다니안 트로이카 투자그룹 이사회 의장은 “실패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실패를 어떻게 성공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한 교육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달 경기도 안산 소재 벤처인들과의 좌담회에서 “벤처기업은 실패를 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벤처창업의 족쇄라고 할 수 있는 연대보증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하는 등 제도가 바뀌어야 하고, 실패 경험을 보유한 벤처기업가를 받아들일 줄 아는 문화 조성이 시급하다. 대학·연구소 그리고 기업에서의 창업을 북돋는 분위기도 필요하다. 창업에 관심이 많은 국내 주요 대학의 한 교수는 “교수가 창업을 준비한다면 마치 시간이 많은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며 “몰래 하거나 휴직을 하지 않는 이상 창업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토로했다. 사실상 교수직을 유지하며 창업을 한다는 것이 한국 현실에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다행히 이 같은 분위기는 올해 개선이 기대된다. 중소기업청 요청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교육 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개정, 대학이 교수 벤처 창업과 운영 지원 내용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할 예정이다. 시행령이 개정되면 모든 대학은 올해를 시작으로 매년 9월 교수의 창업 및 창업 지원 현황을 의무 공시해야 한다. 공시내용은 교수 창업 및 교수와 대학의 지원으로 출범하는 벤처 기업의 실적 등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대학별 벤처 창업 지원 현황과 실적에 대한 비교 평가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김형영 중기청 창업진흥과장은 “학생들이 대학을 선택할 때 해당 대학이 창업을 적극 지원하는 곳인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된다”며 “공시는 기본적으로 대학을 홍보하는 효과가 큰 만큼 대학들은 지원 현황과 실적을 최대한 찾아서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의 연장선상으로 대학 내 창업 경진대회 횟수가 크게 늘어날 필요가 있다. 과거 벤처 붐 당시만도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대회를 개최했지만 최근에는 눈에 띄게 줄었다. 그나마도 형식적이고 예전만큼 과감한 지원이 뒤따르지 못한다. 1990년대 말 벤처창업 경진대회를 통해 창업자금을 마련했던 차상안 아이아라 대표는 “당시 벤처창업 경진대회는 교수, 대학생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최고의 빅 이벤트였다”며 “하루 생활비를 걱정했던 시골유학생에게 창업을 할 수 있는 자본금을 주었다”고 말했다. 대학 내 창업과 관련 기술경영 전문가 양성도 필요하다. 대학들이 기술사업화에 나서고 있지만 기술과 시장을 동시에 이해하지 않고서는 위험성 크기 때문이다. 윌리엄 밀러 건국대 밀러MOT스쿨 명예원장은 “한국의 대다수 대학은 기술 사업화 과정에서 직접 상업적 결정을 할 만한 의사결정자가 없다”며 “이러한 구조는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최근 스마트폰 등장으로 인터넷에서 모바일 중심으로 기술이 급변하고 있다. 새로운 기회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이는 특히 그동안 주류를 이뤘던 복잡한 기술 위주에서 단순하지만 아이디어가 뛰어난 기술이 먹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 때문에 1인 창조기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대학·연구소·기업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술을 창업을 통해 맘껏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것만이 한국 벤처 생태계의 선순환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정부의 대학·연구소·기업 창업 지원책 정부는 지난해 말 확정·발표한 ‘제2기 벤처기업육성대책’에서 기술창업의 저변을 늘리겠다고 밝혔다. 이의 핵심은 대학·연구소·기업의 창업 촉진이다. 기업의 경우 2000년 전후 벤처 붐을 이끌었던 사내 및 분사창업을 지원한다. 대기업·성공벤처기업이 내부공모를 통해 우수아이템 발굴 및 창업준비를 위한 자체 연구공간과 시험설비 등을 무료로 제공한다. 또 사내 및 분사창업자에 대한 전문가 창업컨설팅 및 창업보육센터 우선 입주 등의 혜택을 주기로 했다. 분사창업 촉진을 위한 규제도 완화했다. 대기업이 30% 이상 출자한 경우에도 최대주주가 아니면 중소기업으로 인정하고, 대기업 공장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분사창업기업에는 정부지원사업 참여 시 요구하는 ‘공장등록증’을 발급해준다. 대학과 연구기관 창업 지원책으로는 △창업보육 R&D프로그램 신설 △대학 등 공공시설을 통한 창업보육 기능 확충 △규제완화 및 창업지원 동기부여 등이 있다. 창업보육 R&D프로그램은 대학·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창업과 접목하기 위해 기존 중소기업 R&D자금을 창업보육기업에 중점 지원한다. 또 대학·연구소 간 경쟁촉진과 공정평가를 위한 ‘지역별 기술평가단’을 운영하고 개발성과와 창업자 양성실적을 공개한다. 창업보육기능 확충을 위해서는 기존 창업보육센터 구조조정을 통해 우수센터를 대형화 및 특성화하기로 했다. 자연스러운 경쟁을 통해 전체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취지다. 교수와 연구원의 창업지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작업도 펼치고 있다. 교수·연구원 휴·겸직 창업기업을 기업부설연구소 간이설립 대상에 포함하고, 창업한 후에도 창업기업에서 연구개발한 지식재산권을 기업 소유로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 밖에 교수와 연구원에게 허용된 실험실공장 등록을 대학생 및 대학원생까지 확대했다. 대학 취업지원센터에는 또한 창업전담인력을 배치, 대학생 창업에 대한 현장밀착 지원에 나선다. 중기청은 창업보육센터·실험실 등 대학과 연구소의 창업역량을 활용해 앞으로 3년간 1만개 창업과 3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이다. ◆학내 창업 붐 이끌 대학 기술지주회사 정부는 2008년 ‘산업교육진흥과 산학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산촉법)’을 개정, 대학 산학협력단이 기술 및 현금을 출자해 대학 기술지주회사를 세울 수 있도록 했다. 파장은 상당했다. 한양대가 법 개정 첫해인 2008년 1호 대학기술지주회사를 출범한데 이어 서울대·고려대·서강대·경희대·삼육대·인천대·강원지역대학연합·부산대·동국대 등이 기술지주회사를 출범시켰다. 여기에 연세대·KAIST·성균관대 등 10여개 대학이 설립 준비에 나서고 있다. 이들 기술지주회사는 특히 보유한 기술을 바탕으로 앞으로 10년내 최다 30∼50개의 자회사를 거느리는 그룹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이다. 고려대와 한양대 등은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2020년까지 조 단위 매출을 달성한다는 비전도 제시했다. 정부도 이 같은 대학들의 움직임에 매우 고무되는 모습으로 지원의 고삐를 놓지 않을 태세다. 2015년까지 50여개 대학 기술지주회사 육성을 통해 1만개 일자리 창출을 하겠다고 정부는 최근 밝혔다. 기술지주회사 자회사를 550여개까지 늘려 총매출액 3조30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다. 이를 위해 우선 대학 기술이전전담조직(TLO) 지원 사업인 ‘커넥트코리아’의 2단계 사업이 개시되는 2011년부터 지원 예산을 현재의 연간 6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지원대학도 현재 18개 대학에서 80개 대학으로 늘린다. 또 올해부터 10여개 대학 기술지주회사에 대학당 연간 5억원 규모의 예산을 지원해 현물 출자 시의 기술가치평가, 자회사 출자기술의 기술사업화 검증, 회사 설립시의 전문기관 컨설팅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안병만 과학기술교육부 장관은 “대학기술지주회사는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 모두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며 “그동안 관련 규제가 많았지만 이제 규제를 풀어 각 기업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재정 지원을 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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