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코비은행은 지난 2008년 4월 멕시코와 콜롬비아의 마약 조직이 미국 뉴멕시코 인근 국경마을에서 환전상을 이용해 자금세탁 하는 것을 사전에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금세탁방지 규정위반에 따른 1억4400만달러(약 1685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지난 2005년 12월에는 네덜란드 ABN암로가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 국가인 이란, 리비아 등에 대한 송금을 가담한 혐의로 8000만달러(약 93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같은 해 마카오의 방코델타 아시아는 북한과 거래를 했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아 결국 전 계좌를 동결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됐다. 지난 1월에는 외환은행의 일본 오사카지점이 불법세력으로부터 예금을 받아 다른 고객의 계좌에 입금하면서 예금잔액증명서를 발급해 준 점이 드러나 도쿄지점과 함께 일본 금융감독당국으로부터 3개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 사례들은 모두 국제 조약인 자금세탁방지(AML) 규정 위반에 따른 제재다. 아직까지 국내 금융사가 대규모 제재를 받은 사례는 없다. 그러나 현재 불법자금 유통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우리나라 금융사도 자칫 방심하다가는 자금세탁방지규정 위반으로 인한 엄청난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가 AML를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 관련 법률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이후 지난 2007년 자금세탁방지국제기구(FATF) 가입을 추진하면서 AML을 위한 본격적인 체계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이때 은행들을 비롯해 전 금융사들이 AML 업무를 지원하는 정보시스템 구축을 착수했다. 20008년 외환은행을 시작으로 2009년에 대부분 금융사들이 AML시스템을 가동했다. 중소형 금융사와 카지노들도 형식적인 수준에 불과하더라도 AML시스템을 모두 갖춘 상태다. 따라서 그동안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정보시스템 구축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제대로 된 자금세탁 혐의거래를 적발할 수 있도록 운영에 주력해야 하는 시대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우선 가장 큰 문제점은 인력부분이다. 그리고 시스템적으로 보완해야 할 이슈들도 여전히 많다. ◇AML 전담인력 부족…담당자 없는 경우도=제대로 된 자금세탁 혐의거래를 적발하고 강화된 고객주의의무를 따르기 위해서는 현재의 금융사 전담 인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현재 은행들은 과거보다는 전담인력이 많아져 평균적으로 7∼8명 정도, 많게는 한국씨티은행이 10여명을 보유하고 있다. 또 자금세탁 혐의거래를 적발하는 별도의 모니터링 요원도 10여명 정도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들 은행들의 보고건수에 비교하면 충분한 인력은 아니다. 금융정보분석원에 보고되는 혐의건수는 연간 13만건에 이른다. 이중 80%가 은행에서 발생되는 건수다. 특히 국민은행에서만 보고되는 건수가 연간 1만여건에 이른다. 그래도 은행권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제2금융권의 중소형 금융사는 전담인력이 크게 부족하다. 대형 증권사나 보험사를 제외하고는 전담인력은 1명 정도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 1명이 다른 업무를 겸직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일부 금융사는 아예 전담인력이 없다. 따라서 현재의 인력으로는 자금세탁을 시도하려고 하는 혐의거래를 찾아낼 수가 없다. 단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특정 규칙에 의해 걸러지는 거래를 일괄적으로 보고하는 수준에서 그칠 뿐이다. 이로 인해 혐의거래 보고의 품질이 낮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혐의거래 보고는 지난 2006년 2만4000여건에서, 2007년 5만2000여건, 2008년에는 13만건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보고 건수가 늘어난 만큼 보고 내용의 질은 오히려 낮아졌다고 금융정보분석원은 판단하고 있다. 금융정보분석원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금융사들이 AML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혐의거래 여부를 판단해서 보고하기보다는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걸러진 거래건수를 모두 보고하기 시작했다”면서 “이로 인해 금융사나 보고를 받는 기관이나 불필요하게 업무만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혐의거래로 보고된 건에 대해 질적으로 낮은 보고와 우수한 보고를 구분해 해당 금융기관에 알리는 피드백 제도를 연내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FATF가 국내 AML 적용기준 강화를 요구하고 있어 금융사의 업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FATF가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혐의거래보고 기준금액 철폐, 해외 지점에 대한 AML 적용, 전문가 그룹 적용 등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우선 현행 혐의거래보고 기준금액인 2000만원을 1000만원으로 낮출 계획이다. 그외 다른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단계적으로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전담인력 증원, 모니터링 요원 교육 강화, 협회 차원의 전문가 양성, 금융사 담당자간 교류 강화 등을 실시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미국처럼 AML 전문 자격증 제도 도입도 검토해볼 방안 중 하나다. ◇데이터 수준 제고 등 시스템 보완 요인 남아=대부분의 금융사들은 어떤 형태로든 AML시스템을 갖춰 놓고는 있다. 그러나 은행과 중소형 금융사간의 시스템 수준 차이는 하늘과 땅차이다. 많게는 60억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해 AML시스템을 구축한 은행의 경우 시스템적으로는 큰 문제는 없다.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전 세계적으로도 우리나라 은행의 AML 시스템은 우수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반면 중소형 금융사의 경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중소 증권사나 캐피탈 업체들의 경우 비용절감을 위해 많게는 11개사 공동으로 AML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렇게 공동으로 구축된 AML시스템의 경우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 컨설팅 회사의 AML 담당 임원은 “동일 업종 내 금융사라고 해도 사업영역이나 모델은 조금씩 다르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 구축에 따른 동일한 규칙을 적용했다면 정확한 혐의거래를 잡아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실제 전혀 업무 성격이 다른 온라인 증권사와 투자은행(IB) 업무를 주력으로 하는 증권사가 공동으로 구축하기도 했다. 또 이 임원은 “동일한 규칙이 적용됐기 때문에 한 곳의 규칙만 알면 공동 구축한 금융사 모두를 상대로 자금세탁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우려했다. 더 심각한 곳은 형식적으로 AML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저축은행과 카지노 등이다. 이들 기업들은 대부분 대규모 예산을 집행하기 어려워 자체개발로 형식적인 수준에서 AML시스템을 구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여수신 기능을 갖고 최근 거래 규모가 커지고 있는 저축은행이나 소액이지만 빈번하게 자금을 교환할 수 있는 카지노는 테러단체 등 불법집단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함께 데이터의 질적 수준도 문제다. 금융사들은 강화된 고객주의의무를 적용하기 위해 계좌 개설시 과거보다 더 다양한 고객 정보를 새롭게 받아야 한다. 그러나 새로 받은 고객정보가 기존의 정제되지 않은 고객정보와 일치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될 수도 있다. 자금세탁 혐의거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고객의 가족, 직장, 나이, 급여 등 고객 정보가 정확해야 한다. 더욱이 금융그룹들이 최근 계열사간 고객 데이터 통합을 추진하고 있어 계열사별로 갖고 있는 고객정보들도 모두 통합적으로 정제돼야 한다. 따라서 과거 바젤Ⅱ 승인 때처럼 데이터 품질(DQ)도 AML의 감사요건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신혜권기자 hk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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