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성장->재도약·재기’ 벤처생태계다. 소자본·소수인력에 기술·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창업한 벤처가 기술의 상용화를 통해 성장 후 재도약을 하거나 실패 후 재기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것이 벤처캐피털이다. 벤처캐피털은 벤처가 성장해 시장(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을 때까지 중요한 자금 공급원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투자한 벤처기업이 상장 또는 인수합병(M&A) 과정에서 자금을 회수 후,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벤처기업에 투자한다. 벤처캐피털이 벤처생태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는 윤활유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과거 벤처 붐 시절과 현재의 가장 큰 차이로 벤처캐피털의 투자동향을 꼽는다. 2000년 전후만 해도 벤처캐피털업계가 과감히 투자를 펼쳐 창업이 활기를 띠었다. 좋은 아이디어와 기술만 있다면 벤처캐피털이 먼저 자금을 대줬고 이는 대학·대기업 그리고 연구소의 우수인력들이 대거 벤처시장에 뛰어들게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과거 벤처 붐 시기와는 딴판이다. 벤처캐피털업체들이 초기 벤처기업 투자에 매우 인색하다. 1990년대말부터 지난해까지 총 4차례 벤처 창업을 경험한 한 CEO는 “과거에는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벤처캐피털 자금을 쓸 수 있지만 지금은 비즈니스가 이뤄져야만 벤처캐피털의 관심을 얻을 수 있다”고 최근의 분위기를 전했다. 벤처캐피털업체들이 리스크(위험도)가 큰 투자에 매우 인색하다는 지적이다. 벤처캐피털업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무조건’식 투자로 막대한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 이 때문에 내부 투자심사 규정을 대폭 강화했다. 그러다 보니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갈수록 줄고 자연스럽게 어렵게 난관을 넘어선 후기 벤처기업 투자가 주종을 이룬다. 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집계를 시작한 2002년까지만 해도 설립 3년내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전체의 63.5%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설립 3∼7년인 중기 벤처가 28.1%, 설립 후 7년이 넘은 후기벤처는 고작 8.4%에 불과했다. 그러나 벤처 버블이 꺼지면서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줄어들고 대신 그 자리를 후기 벤처기업이 차지했다. 급기야는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몸 사리기’에 나섰던 벤처캐피털업계는 초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급격히 줄였다. 지난해 10월까지 초기 벤처에 대한 벤처캐피털 투자는 28.6%까지 하락했고 후기 벤처는 39.3%로 중기 벤처(31.5%)를 뛰어넘었다. 벤처캐피털이 고위험고수익(하이리스크하이리턴)을 추구하는 벤처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저위험저수익 기업에 자금을 대고 있는 셈이다. 벤처캐피털업계도 항변한다. 무엇보다 마땅한 투자처가 없다는 설명이다. 과거 벤처 붐 당시에는 인터넷에서부터 반도체 휴대폰의 부품 등 투자처가 많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뜨는 산업이 없다는 이유다. 투자처가 없다 보니 투자했던 곳에 또다시 투자하고, 투자규모도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다. 이는 그러나 벤처캐피털 투자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벤처캐피털이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신생 벤처가 나타나지 않고 이는 다시 벤처캐피털이 투자할 곳이 없어진다. 또 상장을 앞둔 후기 벤처기업에만 안정적으로 자금을 집행하면 기대만큼의 수익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는 투자자(LP) 모집 한계로 이어진다. 김형수 벤처캐피탈협회 상무는 “벤처캐피털이 10배 이상의 고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초기기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행히 최근 초기 벤처기업 투자에 나서는 곳이 등장하고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는 투자심사역들이 초기 벤처기업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3억원 이내에서는 투자심사위원회를 거치지 않도록 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초기기업 전용 벤처펀드도 올해 대거 결성돼 내년 본격 가동한다. 벤처캐피털이 초기 기업 투자에 나서지 않자, 정부가 대신 투자를 독려하는 격으로 과정이야 어떻든 이들 펀드는 초기 기업에 60% 이상을 의무적으로 집행한다. 중기청측은 지난해 초기 기업 전용 펀드가 1000억원 이상 결성된 만큼 올해와 내년 초기 벤처기업에 상당한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도 벤처캐피털의 과감한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중이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제2기 벤처기업 육성대책’에는 이같은 내용이 여럿 담겨 있다. 대표적으로 창업기업 보증연계형 승수 투자제도 시행을 꼽을 수 있다. 기술보증기금의 높아진 기술기업 평가능력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취지로, 벤처캐피털이 창업 초기기업 투자시 기보가 보증을 서는 형태다. 벤처캐피털과 기보 두 곳의 심사를 거친 초기 기업 경우 잠재력이 충분한 만큼 이들에 대해서는 자금이 들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겠다는 의도다. 순수 민간펀드의 자율성 확대, 기관투자가 등 벤처펀드 출자규제 완화 그리고 인수합병(M&A)을 포함 회수시장 활성화 등도 벤처캐피털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뉴스다. 무엇보다 정부는 대기업의 사내 및 분사창업 촉진 그리고 대학·연구기관을 기술창업의 요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젊은 기술창업자 탄생에 크게 기여할 것이며 이 또한 벤처캐피털업계에는 투자기회가 많아진다. 정부는 제2기 벤처기업 육성대책을 통해 제2의 벤처 붐 조성을 선언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업계가 보수·안정적 투자만을 고집한다면 좋은 정책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친다. 벤처캐피털업체의 과감한 투자가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김준배기자 joo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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