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운명
실록(實錄)은 한 임금이 재위한 동안의 치적과 그 밖의 모든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중국 남북조 여러 나라 중 양의 주흥사가 처음 기록했습니다. 현재에도 잘 알려진 「천자문(千字文)」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실록은 모든 임금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남북조를 수습한 수를 이은 당에서 부터 임금마다 실록을 편찬하였고, 우리나라도 고려 때부터 실록을 기록했으나 남아 있지 않고, 조선의 실록이 남아 있습니다. 역대 사서 중 정사(政史)이며, 가장 정사(正史)에 가깝다는 실록은 반드시 임금 사후 편찬되어 조선 개국 초에는 경복궁 내의 춘추관(春秋館)과 충청도 충주 사고(史庫)에 보관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세종 21년(1439)부터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추가 사고를 설치하여 춘추관 충주·성주·전주 4군데에서 역대 실록을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밀려드는 왜군의 처음 상륙지가 경상도라서 그 지역에 위치한 성주 사고와 신립 장군의 충주 탄금대에서의 패배로 충주 사고는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선조의 의주 몽진으로 경복궁이 불에 타버려 춘추관 사고도 같은 운명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다행히 전라도 지역은 왜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아 전주 사고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언제 적이 쳐들어와 사고를 유린하여 실록을 훼손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전주에 사는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 등의 선비들은 임진왜란으로 6월 왜군이 금산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사고 인근 지역으로 가서 태조 영정을 보관하는 경기전 참봉 오희길에게 급보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주 사고에 보관된 태조부터 명종 13대에 걸친 실록과 태조 영정 등을 내장산 용굴암에 옮겼습니다. 그후 이듬해 7월 조정에 반납하기 전까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을 밤낮으로 지켰습니다. 이 공으로 안의와 손홍록은 벼슬을 받고, 전북 정읍 남천사에 배향됩니다. 한편 조정은 이들에게서 실록을 인계받아 해주, 강화도, 묘향산 등으로 옮기다가 전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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