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업적과 평가ƒ.내정개혁 세도 정치하에서 흐트러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가지 개혁을 하였는데, 그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이었습니다.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 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면세, 면역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고 농민을 괴롭혀 오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 는 단호한 결의로 47개소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습니다. 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나아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가계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박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21세가 된 1841년(헌종 7)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綬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철종 때에는 안동김씨가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千河張安)이라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千喜然) 하정일(河靖一) 장순규(張淳奎) 안필주(安弼周)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의 생활을 하였다. 또,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으니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3. 고종 즉위와 수렴청정 그는 시정인과 어울려 지낸 이러한 호신생활을 통하여 서민생활을 체험하였으며, 국민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에도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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