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청의 난 ▣
목차
1 묘청의 난 원인
2 묘청의 난 경과
3 묘청의 난 결과
4 나의 견해
1 묘청의 난 원인
☞ 고려 인종 때 묘청 일파가 음양도참설로써 왕을 움직여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기려고 한 일인데, 이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은 인종 때 국내외가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밖에서 금나라가 고려에 대한 위협을 가증했으며,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 등으로 정치 기강이 어지러웠다.
2 묘청의 난 경과
☞ 고려서경(西京 평양) 출신 술승(術僧)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은 15세에 즉위하였으므로, 국내가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여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풍조로 불안해진 국내정세와 유행하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한 묘청은 인종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국수주의적 입장에 서서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 開城)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인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금(金)나라가 고려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를 자아냈고,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은 더욱 더 기강이 어지러워졌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국수주의적 배타주의를 표방하고,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천도운동을 추진하였다. 원래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시인·문신(文臣)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성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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