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安昌浩)의 생애와 교육사상
.생애와 사상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1878년 평남 강서군 초리면의 대동강 하구 동롱섬에서 농사를 짓던 안교진(安敎晋)의 3남으로 출생하였으며, 그후 평양 대동면 국수당과 남천면 노남리 등으로 옮겨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목동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7세 되던 해인 1894년에는 상경하여 경신학교(敬新學校)의 전신인 구세학당(救世學堂,일명 언더우드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한편 예수교장로회에 입교하였다.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잠시 그곳의 조교로 일하였으며, 청일전쟁을 목도하자 우리 민족에게 힘이 없음을 통감하고 힘만이 독립의 기초요 생명임을 깨달아 이를 신념화하였다.
1897년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필대은(畢大殷)과 더불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관서(關西) 지부를 발기하고, 21세의 약관으로 평양 쾌재정(快哉亭)에서의 연설을 필두로 도덕과 지식, 애국심을 기초로 한 실력배양론을 주창함으로써 근대화에 대한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서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여 평소 그의 지론인 점진적 민족개조사업에 투신하였다. 이 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 사립 초등학교이자 최초의 남녀공학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때 하천 매축(埋築)공사로 개간사업에도 관여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교육사업에 임하고자 그는 도미(渡美) 유학을 결심하고 1902년에 부인 이혜련(李蕙鍊)여사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이때 중간 경유지였던 하와이 근해에서 새벽 안개 속에 희망의 표상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의 실루엣을 보고 그의 호(號)를 도산(島山)이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미국인 가정의 고용인으로 일하는 등 노역에 종사하는 한편 원래의 목적인 학업을 위해서 미국인 소학교(그래머 스쿨)에 재학하는 열성을 보였으나, 인삼장사를 하던 현지 한국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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