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상품이다. 앞으로 모든 전기는 시장원리에 따라 가격표를 붙여서 사고팔아야 한다. 세계 전력시장에 일대 혁명이 시작되고 있다. 지능형 전력망(스마트 그리드)이 그린 성장의 핵심 도구로 부각되면서 전기 에너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180도로 달라지고 있다. 전기는 더 이상 전원 콘센트만 꽂고 나면 신경을 꺼도 되는 자원이 아니다. 할인점에서 생필품을 고르듯이 항상 깐깐하게 비교하고 골라야 하는 소비재 상품이 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존 전력망으로 전기를 잘 써왔는데 이제 와서 지능형 전력망이라는 게 왜 필요하냐고 짜증을 낸다. 그럴 법도 하다. 스마트 그리드가 널리 보급되면 우리는 각종 전기제품을 사용할 때마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저녁에 TV를 보다가 전원을 끄면 그날 TV가 소모한 전력요금(1520원)이 몇 초간 비친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액정화면에 몇 십원씩 요금이 올라가는 게 보인다. 조명을 켤 때, 에어컨을 켤 때도, 인터넷을 하면서도, 전기주전자로 물을 끓일 때도, 전자레인지로 남은 밥을 데울 때도 당신은 얼마의 전기를 사용하는지 분명히 체감하게 될 것이다. 쉬는 날 사무실에서 혼자 일할 때도 자기 책상에만 불을 켜야 한다. 회사에서는 모든 사원들의 개별 전기이용량을 매달 확인해서 인사고과에 반영할지도 모른다. 날씨가 더울 때 에어컨 좀 켜려고 하면 지금 전기요금이 한창 비싸니 잠시 뒤에 이용하라는 안내문자가 액정 패널에 뜬다. 내 돈 주고 전기 좀 쓰겠다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걸까. 그것은 전기를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저탄소정책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전력수요에 맞춰 발전소를 계속 늘리기란 불가능하다. 최선의 에너지 전략은 전력수요를 현 수준에서 동결하는 것이다. 스마트 그리드는 철저하게 시장원리에 따라서 전기를 사고팔면 불필요한 전력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출발했다. 북한이야 전력이 모자라면 비산업시설부터 먼저 전기를 끊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남한은 어디까지나 시장원리에 따라서 전력수요를 조절해야 한다. 비록 귀찮고 성가셔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지속적으로 전력을 사용하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전력망의 미래, 스마트 그리드 현재의 전력망으로는 한국전력공사같이 전기를 공급하는 주체가 전기를 누가, 얼마나 필요한지, 또 얼마나 사용하는지, 낭비되는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일례로 한전은 전기 공급량을 조절하는 기준을 60헤르츠(㎐)라는 표준 주파수에 두고 있다. 60㎐보다 주파수가 떨어지면 예비 발전소를 가동하고 주파수가 높아지면 가동률을 줄인다. 어림짐작의 성격이 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전 세계의 전력회사가 마찬가지다. 19세기 후반 에디슨과 테슬라가 설계한 전력망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력회사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미래의 전력망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통신·네트워크·소프트웨어(SW) 기술을 활용해 전력망을 업그레이드하면 발전·송전·배전 현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안정화함으로써 전력공급량 부족이나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자는 게 기본 아이디어다. 여기에 양방향 통신을 적용하면 기업 현장이나 가정의 전력 수요를 실시간으로 정확히 파악하고 전력수요를 조절할 수 있다. 풍력, 태양광처럼 발전량이 불규칙한 수많은 신재생에너지원을 기존의 전력 공급망과 맞춰야 한다. 남는 전력을 지금처럼 버리지 말고 모아 뒀다가 필요할 때 써야 할 필요도 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스마트 그리드, 지능화된 미래의 전력망이다. 스마트 그리드는 특정한 기술이나 제품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유비쿼터스처럼 현재 전력망보다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지능적인 시스템이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미래 사회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따라서 스마트 그리드를 주장하거나 추진하는 기업이나 단체, 정부마다 구체적인 정의에는 조금씩 차이가 난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스마트 그리드란 에너지 운영과 자원을 최적화하고 물리적인 인프라와 경제 여건에 맞게 에너지 사용을 자동 조정 또는 변형할 수 있는 첨단 기술로 정의한다. 홍준희 경원대학교 교수는 “형광등은 1000원짜리고 원자로는 2조원짜리지만 스마트 그리드에서는 둘 다 하나의 단말기라는 점에서 똑같다”고 말한다. 통신기술을 활용해 전력망의 모든 요소가 네트워크로 동등하게, 또 긴밀히 연결된다는 특성을 지적한 말이다. 이미 스마트 그리드 시장을 향한 각국의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 정부는 지난달 내놓은 경기부양책에서 스마트 그리드 분야에 110억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EU도 수년 전부터 집행부 내에 유럽에 스마트 그리드를 구축하는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전력분야 기술은 우리나라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 정부는 올해 안에 지능형 전력망의 로드맵을 만들고 2011년에 시범도시를 건설해 2030년 전국의 스마트 그리드를 완성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경쟁 배경에는 당연히 스마트 그리드로 창출될 엄청난 규모의 시장이 있다. 미국은 거의 50년 전에 구축해 노후화한 전력시스템을 모두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 끝나면 그 다음은 유럽이다. 아직 전력망 자체가 부족한 중국은 그 자체로 광대한 잠재력을 지닌 스마트 그리드 시장이다. 이 시장의 잠재규모는 수백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전력IT사업단 등을 통해 수년 전부터 비교적 일찍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한국은 지능형 전력분야에서 가격경쟁력과 기술력을 고루 갖춘 몇 안 되는 나라다. 전문가들은 미국·유럽·일본의 전력기기 가격은 너무 비싸며 중국 제품은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한국이 앞선 IT인프라와 전력기술을 이용해서 스마트 그리드의 신모델을 실증하면 거대한 시장선점이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스마트 그리드가 국가 전력망의 효율을 불과 5∼10% 높이려고 너무 과도한 설비투자를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은 전형적인 자원 빈곤국가다. 지금은 경제논리를 떠나서 전력망의 효율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할 시점이다.
◆스마트 그리드의 산적한 과제들 스마트 그리드를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12월 미국 전기자문위원회(EAC)는 ‘새로운 에너지 경제의 동력원’이란 보고서에서 스마트 그리드 달성의 과제로 전력사업자 사업모델, 전력산업 전체의 공조전략 부재, 비용, 안정성, 규제문제 등 8개를 지목했다. 기술적 이슈도 많다. 송전자동화, 배전자동화, 신재생에너지시스템과 전력망의 통합, 스마트 미터링, 분산전원 및 안정적인 에너지저장시스템 구축 등 어려운 기술적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 이 중에서 상용화가 가장 앞선 분야가 수요처의 전력 사용량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스마트 미터링 분야다. 전력회사도 아닌 구글은 지난달 가정이나 사무실의 실시간 전력 사용량을 보여주는 ‘파워미터’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였다. 우리나라의 LS산전도 이와 비슷한 기능의 스마트 계량기의 모델제품을 최근 내놓은 바 있다. 미국의 스마트 미터링 시장은 2010년 13억8000만달러, 유럽은 15억9400만달러로 추정된다. 스마트 그리드의 최대 걸림돌은 ‘뭘 이리 성가시게 구느냐’는 소비자의 반감을 극복하는 것이다. 전력업계는 그동안 여러 가지 전력절감 대책을 시도했지만 결국 사용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전기사용을 당연한 사회적 권리, 공공재라고 여기는 국민의 오랜 습관을 바꾸려면 꾸준힌 설득과 홍보가 뒤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스마트 그리드가 전력회사뿐만 아니라 소비자, 국가경제, 환경에 모두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스마트 그리드에 대한 소비자의 동감을 얻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눈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한 달에 자신이 얼마의 전기를 쓰는지 인식하면 행동이 달라진다. LS산전은 최근 아파트 입주자에게 현재 전기 요금, 누진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집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비를 보급했다. 이로써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전력사용을 줄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실제 80여가구에 직접 설치해 본 결과 순수한 절약분은 5%, 기온변화에 따라 고객을 성가시게 했더니 실제 절감효과는 약 13%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진 LS산전 전력연구단장은 “결국 스마트 그리드의 성패는 소비자 의식에 따라서 결정된다. 고객이 전기를 현명하게 구매하도록 다양한 콘텐츠,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기는 상품이다. 하반기 한전에서 도입할 예정인 선불형 전력량계를 보면 이러한 추세가 여실히 드러난다. 소비자가 몇 만원짜리 전기카드를 구매한 다음 전력량계에 암호코드를 입력하면 돈을 먼저 지급한 만큼 전기를 쓸 수 있다. 전기잔량이 거의 떨어질 즈음이면 인근 슈퍼마켓에서 카드를 재충전하면 된다. 전기가 쌀, 우유처럼 슈퍼마켓에서 구매하는 생필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최순욱기자 choisw@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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