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자치통감
. 사마광의 사상과 생애
사마광은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부(迂夫). 시호는 문정(文正)에 산시성 출생이다. 속수선생이라고도 하며, 죽은 뒤 온국공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이라고도 한다. 20세에 진사가 되고, 1067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에 한림학사, 이어서 어사중승이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신종이 왕안석(王安石)을 발탁하여 신법을 단행하게 하자, 이에 반대하여 새로 임명된 추밀부사를 사퇴하고, 1070년에 지방으로 나갔다. 당시 그는 편년체(編年體)의 역사 《자치통감》을 쓰고 있었다. 신종도 그 책의 완성을 크게 기대하여 편집의 편의를 제공, 그의 뜻대로 뤄양에 거주하며 편집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돌봐주는 등 원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1084년 마침내 전 20권의 《자치통감》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신종이 죽고 어린 나이의 철종(哲宗)이 즉위, 조모인 선인태후가 섭정이 되자, 신법을 싫어하는 태후에게 발탁되어 중앙에 복귀, 정권을 담당하였다.
당시의 연호(年號)를 따서 ‘원우(元祐)의 재상(宰相)’이라고 일컬어졌다. 재상이 되자 왕안석의 신법을 하나하나 폐지하고 구법으로 대체하여, 구법당(舊法黨)의 수령으로서 수완을 크게 발휘하는가 하였으나, 몇 달 안 되어 죽었다. 그뒤로 신법당(新法黨)이 세력을 얻자, ‘원우(元祐)의 당적’(블랙리스트)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 말부터는 명신(名臣)으로 추존되었다. 저술로는 《자치통감》 외에 《속수기문》 《사마문정공집》 등이 있다.
. 성리학과 송학의 발전
Ԟ세기 초, 주전충에 의해서 당이 멸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과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후주의 절도사 조광윤에 의해 960년, 송이 건국되었다. 후주에서 송으로의 왕조 교체는 단순한 왕조간의 권력 이양에 머무르지 않고 종래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송은 당의 화려하고 국제적인 문화에 비해 보수적이었으며, 특히 성리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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