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와 신악부운동
. 백거이의 삶
백거이는 중국 중당시대의 시인이다. 자는 낙천, 호는 향산거사, 시호는 문(文). 허난성 신정 현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 재식겸무명어체용과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좌습유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진중음〉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을 `한적`·`감상`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의 직책에 올라 조칙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쑤저우자사를 역임했다. 뤄양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형부시랑·하남윤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태자소부분사와 같은 경로직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이라 칭하며 만족해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 백거이의 문학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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