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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을 다녀와서


카테고리 : 레포트 > 사회과학계열
파일이름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을 다녀와서.hwp
문서분량 : 9 page 등록인 : cjw1589
문서뷰어 : 한글뷰어프로그램 등록/수정일 : 08.12.06 / 08.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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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설명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을 다녀와서 리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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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일부/목차
1.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2. 제암리 사건
3. 일본군의 만행
4. 3. 1운동의 의의

1.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이번 답사의 테마는 근 현대사의 아픈기억을 찾아서라는 테마였다 그래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탄압을 받은 아픈 기억의 유적지 중에 간 곳은 제암리 3.1 운동 순국유적이였다. 그래서 조금더 자세히 조사하였다. 제암리는 수원에서 서.남방 20km 지점에 위치한 발안에서 또 다시 서쪽으로 2km 지점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로서, 속칭 `두렁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제암리는 비록 작은 마을이기는 하나 일찍이 1905년 8월 5일에 선교사 아펜셀러박사의 전도를 듣고 기독교에 입교한 안종후에 의해 교회당이 세워진 기독교 마을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리 전체가 기독교화된 것은 아니고, 김성렬을 위시한 몇 집의 천도교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는 서로 다르나, 일제의 탄압에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사상은 일치되어 아무 잡음없이 단결되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1919년 2월 하순에 서울에서 한참 독립운동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교회를 세운 안종후가 상경하여 기독교의 지도자인 이승훈과 박희도를 만나고 돌아와서 그 해 2월 27일 밤 천도교측 대표 9명과 기독교측 대표 25명이 안종후의 집에 모여 시위를 벌일 것을 다짐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이 되자, 제암리교회 앞마당으로 동네사람들이 모였으며, 기독교대표 안종후가 나누어 주는 태극기를 받아들고 안종린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어두운 산길을 따라 지내산 봉우리에 올라 봉화를 올리면서 또 다시 만세를 불렀다. 수일이 지난 후, 다시 제암리 교회당 앞마당에 시위군중이 모여 발안주재소를 습격한다는 정보에 따라 완전무장한 사사까를 위시한 일본 경찰 4명이 출동하여 일경 1명이 사망하였다. 이들 일경의 보고에 의해서 헌병대장 아리다도시오와 병력 1개 중대가 출동하여 갖은 행패와 조사활동을 하던 중 3월 31일의 발안시위사건, 4월 1일의 발안일본인 가옥방화사건, 4월 5일 발안시위사건 등을 이유로 4월 15일 오후 2시 30분 일경 조희창과 사사까를 선두로 하여 제암리에 도착하여 기독교 및 천도교 신자 30여명을 교회장 안으로 모이도록 지시한 후 완전 포위하고 교회당을 향해 일제히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당 내에 집합하였던 30여명은 물론 밖으로 탈출한 김정헌 - 노경태 - 안순경 - 홍원식 등은 일본의 헌병들에게 군도로 난도질당하여 죽었다. 한편 일본 헌병들은 교회당 안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확인한 후, 석유를 교회당 내에 뿌리고 불을 질러 시체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상을 자행하였으며,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학살하였다. 이 소식이 유일한 생존자인 노경태에 의해 서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캐나다선교사 스코필드박사는 4월 17일 제암리 참화현장을 답사하면서 일경들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현장사진과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에 발송하였다. 또한 감리교 선교사이며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박사,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주한미국영사인 커티스, 영국 총리사대리 로이드씨, 캐나다 선교사 하마디박사, 게일박사, 감리교의 케이블, 빌딩, 에크 그리고 헬론 스미스가 이에 동조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상을 조사한 후 각자 자기 본국에 알리고 이와 같은 잔악상과 폭압정치에 대한 인류양심의 분기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미국 기독교연합회 협의회는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모아 책자로 발간하여 미국 의회에 제출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대하여는 한국인에의 박해 중지와 행정개혁을 촉구하는 동시에 국제적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부터 63년이 지난 1982년 9월 25일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에서 전동례할머니의 증언에 따라 23구의 시체를 발굴하여 1982년 제암리 16-2번지에 23위의 합동묘를 조성하고 전시관을 건축하였다. 옛 제암리 교회터에는 새로운 3 -1운동 순국기념탑을 건립하여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애국 - 애족 - 애향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장으로 크게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 세워진 제암리 순국선열의 기념비 비문은 초대대통령 이승만박사가 친필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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