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朱子)의 생애(生涯)와 사상(思想)
동덕여대 교수 조준하
一 주자(朱子)의 생애
주자는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을 완성한 학자로 사상가(思想家), 철학자(哲學者), 교육가(敎育家)이다.
주자의 이름은 희(熹=1130-1200)요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유년 시절의 이름은 침랑(沈郞), 침계(沈溪)이고, 자(字)는 계연(季延), 오이랑(五二郞)이라고도 하였다.
세칭(世稱) 평릉 주희(平陵朱熹), 단양 주희(丹陽朱熹), 오군 주희(吳郡朱熹), 신안 주희(新安朱熹), 자양 주희(紫陽朱熹), 추흔(鄒 )이라고도 하였고, 호를 회암(晦庵), 회암통수(晦庵通 ), 백록동주(白鹿洞主), 다선(茶仙), 목재(牧齋), 인지당주(仁智堂主), 둔웅(遯翁), 운학노인(雲壑老人), 창주병수(滄洲病 ) 등이라고 했다.
그는 건염(建炎) 4년(庚戌, 1130) 3월 15일 오시(午時)에 복건(福建) 남검주(南劍州, 지금의 南平) 우계현(尤溪縣)의 의재 정안도(義齋 鄭安道)의 별장에서 태어났다.
건염 4년은 남송(南宋)이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다. 주자의 아버지 위재(韋齋) 주송(朱松)은 금(金)나라의 침입에 항거하여 화의(和議)를 적극 반대하고, 옛 월민족(越民族)의 땅인 민( ) 지방으로 이주하여 숭안 오부리(崇安 五夫里)에 살았다. 따라서 민( ) 지방에 들어온 주씨의 시조가 되었다. 오부리(五夫里)는 병산(屛山) 기슭에 있었다.
주송이 정화위(政和尉)가 되어 민( )으로 이주한 후 그의 아버지 주삼(朱森)이 별세했다. 가난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葬禮)를 할 수 없었으므로 그 땅에 매장(埋葬)하고, 우계 현위(尤溪縣尉)가 되었으나, 임기를 마친 뒤 의재(義齋) 정안도(鄭安道)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정의재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가 된 사람인데 그와 친분이 있어 그의 별장을 빌려서 살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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