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熱河日記)
. 지은이 박 지원(朴 趾源, 1737-1805)
박지원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문장가이자 대실학자였다. 그는 1737년(영조13)에 서울 서대문에서 박사유(朴師愈)의 이자(二子)로 출생하였는데, 그의 호는 연암(燕岩)이고 자는 중미(仲美), 본관은 반남(潘南)이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조부(祖父) 박필균(朴弼均)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는 등 역대의 명문가에 속하였다. 그러나 부친 박사유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조부 슬하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이르면 그는 조부마져 여의게 되었는데, 바로 그 해에 변안제(邊安齊)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제서야 그는 본격적인 글공부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조부인 박필균이 외롭고 어린 박지원을 불쌍히 여겨 글을 가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박지원에게 처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처삼촌인 영목당(榮木堂) 이양천(李亮天)이었다. 이양천은 당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있었는데, 그는 박지원의 출중한 재질에 놀라 학문 전반을 가르치면서 매우 총애하였다 한다. 박지원 역시 만학의 어려운 여건을 학문에 대한 정열과 뛰어난 재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는 집중적인 노력으로 유교경전(儒敎經典)·제자백가(諸子百家)·병농전곡(兵農錢穀) 등을 차례로 익혔으며, 천문학과 지리학까지도 섭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약관 20대에 이미 탁월한 문인이자 진보적인 사상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당시 사회의 불합리한 측면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비판한 양반전 (兩班傳)을 비롯한 9편의 소설(小說)은 모두 20대에 저술(著述)하였으며, 30대에는 스승으로도 활약하여 박제가(朴齊家) 등의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그후 연암은 관직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도 새로운 농서(農書)인 과농소초 (課農小抄)’와 토지개혁안인 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까지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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