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장지의 역사
옛날에 종이는 귀한 물자였다, 종이가 발명된 것은 2세기경 중국에서였고, 그것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4,5세기나 되어서의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 에 이르러서야 자체 생산된 종이가 쓰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종이보다는 대부분 목간이라는 나무쪽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사정은 757~764년에 토우다이지에서 경전 간행시 쓰인 종이의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상품의 경우 일본 돈으로 2냥. 가장 싼 것이 1냥이었다고 한다. 당시 쌀 한되가 5.5냥이었으므로, 최상품의 종이는 두 장 반 값으로 쌀 한 되를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최하품의 종이라도 쌀 한되로 5장밖에는 사지 못했다. 이렇게 비싼 종이를 뒤를 닦는 데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세서라고 해서 한 번 썼던 종이의 먹물을 씻거나 혹은 이를 풀어서 재생지로 만들어 쓰는 일이 보통이었다. 이는 아름다운 풍속이었고, 낭만이 있는 일로 전해지고 있다.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이러한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에도 종이가 귀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492년에 종이 한 장의 가격이 2냥이나 되었다. 일꾼의 일당이 10냥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일해서 종이 5장 정도밖에 살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 시대의 일본 귀족이나 헤이안 시대의 미녀, 무사들도 종이로 뒤를 닦는 일은 없었다.
혼란스러운 전국 시대의 한 기록에는, 무사의 저택에서 변소를 만들고 ‘그 선반에 나라 종이를 두었다’라고 되어 있다. 나라 종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에서 생산된 종이를 통칭한느 말로. 돈과 권력이 있는 무사들은 이 종이로 뒤를 닦았던 것이다. 전쟁을 혼란한 시대에 종이로 뒤를 닦는 무사의 등장은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본격적으로 뒤를 닦는 데 종이가 T,인 것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무사들 뿐만 아니라 상인들까지도 뒤닦기용 종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에도에서 쓰였던 그 화장지는 폐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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