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 김성수의 활동과 업적 및 그와 관련된 유적지 답사 보고서 1. 서론 2. 본론3. 결론1. 서론 인촌 김성수. 구한말로부터 6.25전후까지 나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암울했던 65년간의 세월 속에서 민족의 교육과 자본, 국가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애썼던 민족의 선각자였고 겨레의 스승이었다. 인촌은 1891년 10월11일(음9월9일) 전라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김경중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살 때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출계(出系)했다.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8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914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15년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1917년에는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 경영하다가 1919년 10월에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함으로써 30세에 교육 산업 언론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과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29년 12월 구미 선진국의 교육문물을 시찰하고 1년9개월 만에 귀국한 인촌선생은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숙원이었던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이룩하였으며 해방 후 1946년8월 보성전문학교를 기초로 하여 고려대학교를 발족시킴으로써 민족사학의 터전을 다졌다.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의 수성총무(당수)를 맡고, 1951년 5월 피난수도 부산에서 제 2대 부통령에 피선되었지만 1년만에 사임하는 등의 많은 정치적 활동을 하다 1955년 2월18일 6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혹독한 일제시기 하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하여 다방면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제말기에 친일파로 변절했었다는 주장아래에서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많이 절하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친일파청산이야 말로 현대에 남겨진 가장 큰 과제이자 처리해야할 가장 큰 역사적 사명 중 하나이지만, 단순히 인촌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그의 업적을 묻어두기엔 그가 민족 교육과 경제, 정치 등에서 남긴 것들이 현재까지도 ...
· 해피레포트는 다운로드 받은 파일에 문제가 있을 경우(손상된 파일/설명과 다른자료/중복자료 등) 1주일이내 환불요청 시 환불(재충전) 해드립니다.
(단, 단순 변심 및 실수로 인한 환불은 되지 않습니다.)
·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브라우저 오류로 인해 다운이 되지 않으면 고객센터로 문의바랍니다.
· 다운로드 받은 파일은 참고자료로 이용하셔야 하며,자료의 활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운로드 받은 회원님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안내
보고서 내용중의 의견 및 입장은 당사와 무관하며, 그 내용의 진위여부도 당사는 보증하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저작권 및 모든 법적 책임은 등록인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저작권 문제 발생시 원저작권자의 입장에서 해결해드리고 있습니다. 저작권침해신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