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유망·유관 산업과의 연계방안을 수립하라.” 현재 과학기술계는 고급 인력 이탈과 정책 부재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고급 인력은 의학 분야로 진로를 바꾸는 추세고, 국가적인 과학 경쟁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른바 이공계의 위기 또는 기피현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 분야 및 이공계가 외면받는 것은 한마디로 운신의 폭이 좁기 때문. 학부는 물론이고 석·박사까지 10여년간 공부해도 직장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며, 구하더라도 대우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구조조정 태풍이라도 불면 어디 갈 곳도 없다. 당연히 우수 인력은 굳이 미래가 불투명한 과학기술 연구보다는 부와 명예가 보이는 의대나 치대를 택한다. 이것이 이공계 기피현상의 핵심이다. ◇이명박 정부, 과기부 없애고 이공계 살린다(?)=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5일 취임사를 통해 부처 폐지로 다소 위축된 과학기술계를 의식한듯 과학기술에 대한 비전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과학이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고 선진화시킨다”며 “과학자를 존경하고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어 가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거대 기술에 대해서는 국가가 장기계획을 갖고 밀어주고, 대학과 기업과 정부의 연구개발 협력체계도 보다 실질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덧붙였다. “과학이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고 선진화시킨다”는 말은 다름아닌 실용주의적 과학관이다. 과학은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는 유용한 도구기 때문이다.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내정자도 27일 열린 인사 청문회 모두 발언에서 “과학기술은 경제발전의 도구일 뿐 아니라 나라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라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은 우리 미래사회의 역량을 높일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 대통령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는 ‘과학기술이 경제발전 도구’라며, 그 도구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부서를 해체, 격하시켰다. 대부대국제라는 맥락에서였지만, 경제발전의 도구인 과학기술은 뒷전으로 밀렸다. 뒷전으로 밀려난 과학과 공학에 대해 지원자들이 줄어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나라 이공계 인력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 없다. 각 대학의 이공계 관련 학과는 경쟁률이 점점 낮아지고, 심지어 지난해 포스텍(옛 포항공대) 수석졸업자는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서울의대에 편입했다. 서울대 자퇴생 중 공대, 자연대생의 비율은 지난 2000년 30%에서 2002년 36%로 늘었다. 2003년 이후에는 전체 50%를 넘기도 했다. 자퇴생 대부분은 의학이나 인문계열로 방향을 바꿨다. 2000년 이공계 대학생 입학 정원은 13만여명에서 2006년에는 11만6000여명으로 줄었다. 반면에 의약계 대학 입학 정원은 10만여명에서 12만여명으로 늘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과학기술 고급두뇌 확보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2004년 기준 우리나라 18세 이상 인구 중 이공계 박사 학위자 비율은 0.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5%에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창의적인 교수가 창의적인 학생을=이공계 기피현상 심화 원인은 △과학자에 대한 낮은 처우와 사회적 인식 △고용불안 △우수 교수진의 부재 등을 꼽을 수 있다. 막대한 학습량과 시간을 들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더라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기업에서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이공계 인력 비중이 높지 않다.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시민연합(과실연) 김학진 사무국장은 “평생직장이 없는 상황에서 과기인들은 직장에서 구조조정을 당하면 다른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이를 국가가 연금제도를 만든다든지 해서 해결책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수 교수진 인재 풀이 적은 것도 문제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2006년 기준 우리나라 172개 국립 및 사립대 전임교원 5만5343명 가운데 외국인 교수는 총 2078명으로 3.75%에 불과해 교수 인재 풀이 좁은 것으로 파악됐다. 현대판 과학기술계 ‘쇄국주의’인 셈이다. 개방과 진보를 기반으로 하는 과학과 공학의 특성상 다양한 생각과 연구성과를 지닌 사람들이 협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과학기술의 순혈주의가 이어지고 있다. 우수인재에 대한 창의적 교육도 절실하다. 산업자원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IT 기반의 창의적 설계능력을 갖춘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2002년부터 한국산업기술재단 주관으로 ‘창의적 공학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다. 현장 실무 공학설계 교육 프로그램을 확산시켜 신제품 개발에 필요한 창의력과 시스템 통합설계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인력양성 사업의 하나다. 이론이나 논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기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주의’에 입각한 공학인재 양성책이다. 실제 기업이 요구하는 기술 개발이 확산되면 인재들의 진로가 다양해질 수 있다. 반드시 연구소뿐 아니라 실제 기업 현장에서 활용도가 높아진다. 또 학문간 연계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의학계 인력을 미래 유망산업에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의학 기초 분야를 화학이나 생명공학 분야와 연계하고 의료기기나 신약개발, 센싱 산업등과 연계해 사업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면 우수 인력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연구와 인력의 영역을 넓혀주는 것, 창의적이며 실용적인 공학교육이 우리 과학기술계의 살길이다. 이병기 서울대 교수(과실연 상임대표)는 “청와대에 국가 CIO 겸 과학기술 특별보좌관을 둬 대통령을 보필토록하고 학문의 융합 추세에 맞게 문과와 이과 구분을 실질적으로 철폐하는 교육개혁을 바란다”고 말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경영공학부 교수(정보경영공학전문대학원장)는 “이공계 출신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한다”면서 “연봉면에서 박탈감을 갖지 않도록 하고 공직에도 활발히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경원기자@전자신문, kwjun@
◆테크노크라트‘어떻게’양성이 더 중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일반 행정 업무에서도 기술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IT 분야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유무는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IT 테크노크라트 양성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과학과 산업을 ‘지식경제부’로 묶어낸 이명박 정부는 테크노크라트가 과거 어느 정권보다 절실하다. 과학과 산업을 두루 이해하고 정책을 집행해야 제대로 된 산업 양성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담당하는 ‘과학기술 교육’과 지식경제부가 담당하는 ‘과학기술 응용·산업화’의 가교 역할을 위해서 테크노크라트 양성은 절대적이다. 테크노크라트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잠재 성장률에 있다. 잠재 성장률 향상을 위해서 과학기술 발전과 정책의 조화는 필수적이다. 신재생에너지 이용이나 잠재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일 대부분은 과학기술 발전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현재 전체 공무원의 30% 수준인 이공계 출신 비율을 40% 정도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테크노크라트 비중을 높이기 위해선 먼저 이공계 지원 비율을 높여야 한다. 이공계를 졸업하는 인재가 많아야 공직으로 유입되는 사례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질과 양’ 모두 중요하다. 이공계 지원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이공계 출신에 대한 처우 개선 또한 개선돼야 할 부분이다. 연구비를 걱정하지 않고 연구와 교육에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이공계 출신의 공직 진출을 확대하기 위한 지원책도 마련돼야 한다. 행정고시 등 공무원 임용시 이공계 출신에 대한 가산점을 주는 것 등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공계’ 양성을 위한 제반 환경이 해결되지 않으면 신정부의 테크노크라트 양성은 공허한 울림이 될 수 있다. 현재 ‘이공계 기피현상’ 부작용으로 생긴 과학기술계의 적은 인재 풀 등 부작용이 점점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덕환 교수(서강대 화학과)는 “테크노크라트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기에 이제는 새로운 정의의 테크노크라트가 필요하다”며 “어떻게 키우는가가 중요하고 동시에 과학기술 연구에 더 많은 노력과 공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현기자@전자신문, argos@
◆해외사례/ 미국의 ’STEM 육성’ 모델 ‘STEM 교육에 미국의 미래가 달렸다.’ 미국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과학기술자문단(National Science Board)이 최근 발표한 ‘과학, 기술, 공학 및 수학(STEM) 교육 시스템의 핵심적 수요를 겨냥한 국가적 행동 지침’은 효과적인 과학기술 교육 정책을 고민하고 있는 새 정부에 좋은 참고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국립과학재단(NSF)의 지원을 받아 2년간의 연구를 통해 완성된 이 보고서는 단순히 과학기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연방정부와 주정부, 각급 학교, 인력양성 기관 등 교육과 관련된 각 주체들이 실천해야 할 과제와 권고안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권고안에 따르면 연방정부는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는 과학교육 개선을 위해 국가적 로드맵을 마련하는 한편, 교육차관보를 신설해 각급 기관과의 과학교육 조정 업무를 맡겨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 의회는 독립적인 과학교육위원회를 설립할 수 있는 법안을 제정하는 한편, 주정부는 과학교육에 필요한 세부지침과 평가시스템을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각급 학교는 주 정부와 함께 산업계의 수요를 파악하고 논의 기구에 참여하도록 했고, 유능한 과학교사 양성을 위해 처우를 개선하고 직업 유동성 보장을 위해 교사 인증제를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보고서는 각 기관들이 시스템 내에서 일관성을 갖추고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교육의 시너지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과학교사 양성을 위해 각급 기관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자세히 다뤘다. 이번 보고서는 현 부시 정부뿐만 아니라 차기 정부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는 ‘실용적 과학정책’과 ‘기초과학 투자’를 공약으로 내걸고 저소득 지역 학교에 대한 기술 교육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으며, 힐러리는 과학·수학교사의 인원와 자질을 위해 NSF 장학금을 대폭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새롭게 부상하는 아시아 국가들에 과학 최강국의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미국 정부는 우리나라 한 해 예산의 절반이 넘는 1420억달러(133조여원)의 돈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입해 미래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정지연기자@전자신문, jy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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