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華城) 築造에 關한 理解 1. 시작하는 말 中世社會의 解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18세기 말 水原地方은 行政邑治의 移轉. 昇格과 화성축조를 계기로 일대 변화를 맞이하였으며, 이러한 수원지방의 社會的. 行政的 대변화의 첫 번째 계기는, 정조 13년(1789) 7월 亡父인 莊獻世子(장헌세자)의 陵墓(능묘)를 구읍의 主山이며 풍수지리상 最吉地의 명당으로 지목된 花山으로 遷葬(천장)이 결정되면서 부터였다. 舊邑治(구읍치)인 龍伏面(용복면-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 화산에서 八達山 기슭으로 신읍치를 이전함과 동시에 行宮을 비롯한 여러 官衙의 시설물과 민가. 도로. 교량 등이 營建(영건)되는 등 大都會地로서의 면모를 점차 갖추게 되었다. 더욱이 정조 17년 1월 留守府(유수부) 승격과 더불어 행궁과 여러 관아들을 크게 증축하여 小京으로서의 체모를 높이는 한편, 국력을 기울여 이듬해 2월말부터 동왕 20년 9월 상순까지 2년 7개월에 걸쳐 園寢(원침)과 行宮의 수호를 위한 華城(화성 수원성)이 축조되었다. 이 역사적인 築城作業이 성공을 거두기까지에는 국왕 정조를 비롯한 蔡濟恭(채제공). 趙心泰(조심태) 등의 관료, 實學者 鄭若鏞(정약용)과 畵家 嚴致郁(엄치욱) 등 많은 사람들의 열성과 기술적 創見 그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募軍인 衆民들의 노력이 합쳐져 이룬 결과였다. 특히 茶山을 비롯해 성곽설계에 참가한 사람들은 우리 나라와 중국의 옛 城制, 김종서. 유성룡 등 선인들의 축성 경험과 유형원. 이익.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 실학자들의 先進的인 築城論(축성론)을 종합, 검토함으로써 마침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구조물인 대규모의 수원성을 完工시킬 수가 있었다. 또한 承政院日記(승정원일기). 정조 17년 12월 8일조에 의하면 이읍(移邑)의 役事와 함께 華城城役에 있어서는 종래의 강제성을 띤 징발부역군의 방법이 아닌 매일 2錢 5分씩의 雇價를 받는 雇用役夫(고용역부)인 募軍(모군)의 동원방법을 일반화함으로써 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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