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를 통한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와의 만남 쇼펜하우어의 찬미자인 니체는 바그너의 미학이론들이 불확실한 바탕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그너를 감싸주기 위해서 그 사실을 무시하고자 하는 점에 신중한 고려를 해 왔다는 감이 있다. 1854년에야 비로소 바그너는 철학대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통해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연하게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기 구상이 뚜렷한 형태를 취하게 되던 때와 같은 달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음악은 가장 고상하면서도 가장 자유로운 예술형태인 바, 어떤 매개체적인 표상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형이상학적인 본체를 나타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드레스덴에서의 여러 해 동안 체득된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전환되면서부터 뻗어나게 된 하나의 이념으로, 예술이란 직접적으로 또는 비인격적으로 말의 지배하에서 평가되어진다는 바그너의 젊은 시절의 이론들이 바뀐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바그너의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사라졌고, 대신 창조적인 예술이론들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그의 직관력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집착은 그로 하여금 음악의 탁월함을 오페라에서만 취하도록 이끌어갔다. 이것은 바로 그 끊임없이 변화하는 감정의 본보기이며, -니체가 후에 단호히 부정한 하나의 기법이지만- 전체구조 내에서 임의적으로도 음률의 연속성이 가능하다는 결과를 끌어냈다. 마찬가지 입장에서, 바그너에 대단히 열광해 있던 정치작가인 콘스탄틴 프란츠에게 두번째 상을 헌정한 것은 니체의 견해에 대한 반대의 사건이었다. 작곡가에 대한 젊은 찬미자 니체는 프란츠의 반유태주의·프랑스 혐오증 그리고 또 독일제국에 대한 그의 국수주의적 자부심에 관하여 모르고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나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를 전혀 거리낌없이 예찬함으로써 이 나이어란 철학도를 분명히 그가 뜻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온 셈이다. 쇼펜하우어는 니체와 바그너 양자 모두에게 그들의 지적인 발전에 중요한 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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