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생가 답사기 다산 정약용은 소위 명문가의 가정에서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의 넷째 아들로 경기도 廣州 草阜面 馬峴(마재라 불리기도 한다.)에서 태어났다. 한강의 상류이자 마재 앞을 흐르는 강을 소내라고 불렀기에 다산은 자신의 고향을 소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인데 자동차를 타고 팔당댐을 낀 국도를 따라 수 킬로 달려가다 보면 조용하고 아늑한 능내리가 나온다. 다산 유적지는 정약용의 선생의 동상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생가, 정약용 선생과 그의 부인 홍씨의 묘, 사당, 다산 기념관 , 다산 문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산유적지에 들어가기 전 다산유적지에 들어가기 전에 문화의 거리라 하여 반듯하게 돌길이 닦여 있고 바로 길 양 옆에 사람 키 높이의 나무 기둥들이 정렬되어 있다. 그 나무에는 눈높이의 위치에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목민심서의 각 구절이 적혀 있다. 또 나무 기둥들 좌측 바깥쪽에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의 서문이 비석에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다산이 고안하였고 수원성을 쌓는데 사용된 거중기와 녹로가 전시되어 있다. 거중기는 1972(정조16년)에 왕명에 따라 1627년 독일 선교사 Schreck.J 가 저술한 기기도설에 실린 그림을 보고 고안한 운반도구로 밧줄, 도르래를 사용한 기구이고 녹로는 토목이나 건축공사 등에서 도르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데 쓰는 운반도구로서 1796(정조 20년)에 화성 성곽을 쌓을 때 거중기와 더불어 사용되었다고 설명이 적혀 있다. 실물은 아니고 화성성역의궤 를 보고 축소 모형으로 만든 것이다. 다산은 화성을 쌓을 때 이 거중기를 설계, 사용함으로써 예산 4만 냥을 절약하였다고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해배(解配)하던 해 봄에 완성된 것으로 비석에 새겨진 서문은 이러하다. “군자의 학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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