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번화가 미쓰비시은행에 가면 특이한 광경 하나를 볼 수 있다. 은행 자동화 장비(ATM)로 현금을 인출할 때 흔히 사용하는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부 ATM에 달려 있는 지문인식 기능도 없다. 전면에 있는 디스플레이에 손바닥을 쫙 펴 보이면 그만이다. ‘손바닥 정맥 인식(Palm Vein Recognition)’을 통한 신원 검증이다. 정맥 인식은 적외선으로 혈관을 투시한 후 반사되는 잔영을 이용해 신분을 혈관 형태로 인식하는 기법이다. 복제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보안성 때문에 차세대 보안 기술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이 시스템은 미쓰비시 은행뿐 아니라 히로시마은행과 후지쯔 본사·연구소 등 주요 건물, 도쿄대학 병원 등에서 출입 통제와 신원확인 용도로 사용 중이다. 이 기술을 일본에서 처음 상용화한 업체가 바로 ‘후지쯔연구소’다. 후지쯔의 연구개발(R&D) 모토는 ‘시장 중심의 기술 경쟁력 확보’다. 정맥 인식 기술도 이런 토대에서 남들보다 앞서 개발에 나선 결과다. 무라노 가즈오 후지쯔연구소 사장은 “수많은 차세대 기술 중에서 산업과 기업에 바로 접목 가능한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며 “정맥 인식을 포함해 차세대 네트워크 시스템, 나노 기술 등 최근 주력하는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기초 기술력 확보보다는 시장 응용에 초점을 맞췄다”고 강조했다. 후지쯔연구소는 글로벌 IT 시장에서 후지쯔를 기술·시장·서비스 혁신그룹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다. 지난 1962년 설립해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일본 가와사키현에 본사를, 미국·유럽·중국에 해외 거점 연구소를 두고 있다. 전체 연구 인력은 본사와 거점 연구소를 통틀어 1700명에 이르며 한 해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예산이 400억엔을 웃돈다. 이는 2006년 전체 후지쯔그룹 연구·개발 예산(2550억엔) 가운데 6분의 1을 차지하는 규모다. 후지쯔그룹의 R&D 조직 체계는 기술 시너지를 목표로 편재돼 있다. 그룹에 필요한 기초 기술, 선진·응용 기술은 모두 중앙연구소인 후지쯔연구소 책임이다. 후지쯔연구소는 기술 분야에 따라 7개 연구팀과 6개 센터로 세분화해 차세대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룹 각 사업부에도 별도 연구 조직을 두고 있다. 연구소는 각 사업부의 연구 조직과 유기적으로 연계해 기술을 확보하고 현업의 요구와 지원에 실시간으로 대응해 준다.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시장과 고객을 위한 기술을 만들자는 취지에서다. 후지쯔그룹 이시다 아미 글로벌PR 담당은 “시장 주도 제품 개발, 글로벌 네트워크 강화, 파트너십 구축, 지식재산권과 표준화 활동 등 당면 현안에 가장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조직 편제를 찾았고 이 결과가 바로 지금의 후지쯔 연구조직”이라며 “그룹 안에서도 사업부 별로 흩어진 연구 조직의 시너지를 위해 프로젝트 단위로 주력 연구 분야를 나누고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 거점 연구소의 개발 영역도 서로 다르다. 지난 93년에 설립한 미국 캘리포니아·텍사스·메릴랜드 연구소는 차세대 인터넷, 망 연동 기술, LSI-CAD와 같은 반도체와 소프트웨어에 집중하고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 두 곳에 있는 중국연구소는 통신장비, 웹 프로세싱, 시스템LSI처럼 독자 표준을 고집하는 중국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 글로벌 연구소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2001년에 설립한 유럽연구소는 생체 인식, 그리드 컴퓨팅, 차세대 통신장비 기술을 확보하는 게 목표다. 후지쯔그룹이 가장 주력하는 연구 테마는 유비쿼터스 시대를 대비한 핵심 기술력이다. 이를 위해 2010년을 목표로 기술 로드맵을 만들고 IT플랫폼에서 정보보안, 서비스와 애플리케이션, 하드웨어까지 총 8개 분야로 나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애플리케이션 분야는 모델링에서 실행·모니터링·분석까지 기업의 전반적인 업무 흐름의 생산성을 높이는 차세대 BPM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IT플랫폼은 그리드와 페타 컴퓨팅 쪽에, 네트워크 인프라와 관련해서는 차세대 네트워크(NGN)에 자원을 집중하고 있다. 정맥 인식 기술과 함께 시스템LSI 연구 조직에서 심혈을 기울이는 ‘H.264’ 이미지 코딩 기술도 후지쯔가 ‘미래 먹을거리’로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분야다. 무라노 사장은 “기술이 곧 시장을 만든다는 게 후지쯔의 철학”이라며 “개발 후 사장되는 기술이 10% 미만일 정도로 시장 중심적인 기술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도쿄(일본)=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 ◆인터뷰-가즈오 무라노 사장 ―후지쯔의 기술 철학은. ▲세계적으로 연구 개발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OECD 국가를 중심으로 매년 연구개발 예산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 준다. 등록된 특허 수보다 기술 수준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우리만의 차별화된 기술력을 가질 때 블루오션을 개척할 수 있는 신제품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주력 연구 분야는. ▲2010년까지 차세대 R&D 로드맵을 확정한 상태다. 그리드컴퓨팅·45나노 반도체·IP기반 음성 솔루션·영상 코딩 등 신소재에서 반도체·네트워크·솔루션까지 다양한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2010년에는 1초당 1페타바이트(1000조) 연산이 가능한 페타급 슈퍼컴퓨터도 선보인다. 바이오 메트릭스를 활용한 보안 기술, 저전력 e페이퍼, 디지털 방식의 실물 모형 기술, 업무 프로세스 모델링 기술, 초소형 전자태그 기술도 이미 상용화됐거나 상용화 준비가 끝났다. ―기술 투자 현황은. ▲후지쯔 연구 조직은 크게 중앙연구소와 사업부 산하 조직으로 나뉜다. 연구소에서 상용화한 기술은 전체의 45% 정도다. 나머지 55%는 각 사업부의 프로젝트에서 거둔 성과다. 중앙연구소는 개발 과제에 15%, 미래를 위한 선진 기술에 40%, 개발과 자동화 기술 등 그룹에서 인프라 기술로 활용할 수 있는 공동 기술에 30%, 사장할 위험성이 있지만 도전 가치가 있는 기술에 15%로 분산해 투자하고 있다. ―당면 목표는. ▲R&D 분야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파트너십을 적극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를 위해 해외 거점 연구소 인력을 대거 충원하고 공공기관·대학 연구소와 연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에는 개발 전문법인으로 ‘QD 레이저’를 처음 설립할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다. 한국에서도 기회가 된다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기술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고 싶다. ◆무라노 가즈오 사장은.. 무라노 가즈오 사장은 도쿄대학과 프린스턴대학을 거쳐 72년 후지쯔연구소에 입사했다. 1987년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과장, 1993년 멀티미디어 시스템 기술 연구부 부장을 거쳐 2001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글로벌 비즈니스 그룹장으로 미주와 유럽을 맡았으며 2002년 그룹 부사장을 지냈다. 그룹 부사장 당시 해외 영업부를 책임지면서 엔지니어와 영업을 두루 거친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다. 2004년 후지쯔연구소 사장으로 부임해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 국제 전자 조직의 하나인 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와 전기정보통신기술자위원회(IEIEC) 표준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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