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 시장에 또 하나의 ‘빅딜’이 이뤄졌다. 에이서가 게이트웨이를 집어 삼켰다. 두 회사는 2006년 각각 판매 대수 기준 점유율 4위, 8위로 ‘글로벌 톱10’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인수 규모를 떠나 브랜드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2000년 이후 PC 산업계에서 이뤄진 세 번째 메가 인수·합병(M&A)이다. HP가 컴팩을 인수한 게 2002년, 레노버가 IBM PC 부문을 사들인 게 2005년, 올해 에이서와 게이트웨이까지 평균 2년 주기로 PC 시장은 요동쳤다. PC 업계에 M&A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점이 지난 2000년. 2000년은 공교롭게도 PC 수요가 최대 정점을 찍은 해였다. 85년부터 꾸준한 성장세를 누리던 PC 수요는 2000년 말 성장률이 꺾여 2001년 처음으로 4% 이상 감소했다. 이 때부터 PC 시장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이어 PC 업계를 강타한 건 구조조정의 서슬퍼런 칼날이었다. 2000년은 새로운 세기를 열었지만 PC시장에서는 그 때부터 재앙의 시작이었다.
#‘260억달러에서 7억달러까지’ 새천년 들어 IT 하드웨어 업계에 제일 먼저 들려온 ‘빅 뉴스’는 HP의 컴팩 인수였다. 이보다 4년 전인 98년 컴팩이 DEC를 인수했으나 규모면에서 HP와 컴팩 사례에 비길 수 없었다. 그 때만 해도 PC는 성장세는 다소 꺾였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사업의 하나였다. 당시 인수 가격만도 ‘240억달러에서 260억달러’를 오르내렸다. 이어 2005년 퍼스널컴퓨터의 원조를 자처하던 IBM이 PC 사업을 포기했다. PC 부문 전체를 중국 레노버에 팔았다. 매각 가격은 ‘17억5000만달러’였다. 컴팩 인수의 10분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소형 PC에서 중대형 서버까지 전체 라인업을 갖춘 컴팩에 비하면 사업 규모는 작지만 IBM이라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낮은 가격이라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다시 2년 후 에이서가 게이트웨이를 인수했다. 가격은 ‘7억1000만달러’. 지금부터 10년 전인 97년 컴팩에서 게이트웨이 인수로 제시한 가격은 이보다 10배인 70억달러였다. PC업계의 ‘몸값’이 날개없이 추락한 것이다.
#싸우는 중국과 대만, 느긋한 미국 지난 2002년 HP가 컴팩을 사드렸을 때 제일 긴장했던 업체는 델이었다. 델은 당시 HP와 치열한 시장 수위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 기업끼리 인수합병이었다. 중국 레노버가 IBM PC 부문을 인수할 때 제일 가슴을 졸인 건 대만 에이서였다. 당시 에이서는 IBM과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에이서는 그 때의 설움을 기어히 이번 빅딜로 풀었다. 2005년 연이은 두 건의 인수에서 공교롭게 피인수 기업은 모두 미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 파장은 ‘HP-컴팩’ 당시와 상당히 다르다. HP와 컴팩 딜 이후 PC 시장의 경쟁 구도는 ‘넘버 3’ 싸움으로 재편했다. 이미 1, 2위는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굳어진 상태다. 가장 유동적인 3위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시장 수위인 HP와 델이 차지하는 점유율을 합치면 35%에 달한다. 반면 2, 3위의 격차는 10% 가까이 벌어진 상태. 소비 시장에서 브랜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 몇 년 동안 3위 업체가 1, 2위로 진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3위 자리를 놓고 대만 에이서와 중국 레노버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동안 HP와 델은 저만큼 달려 가고 있는 상황이다.
#‘규모냐, 속도냐(Big or Speed)’ PC 시장은 ‘규모전’과 ‘속도전’으로 나눠 진행 중이다. ‘HP-컴팩’에서 ‘에이서-게이트웨이’ 사례까지 덩치를 키우는 목표는 분명하다. 시장 점유율이다. 승자는 그만큼 유리한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다. 당장 피인수 기업 점유율을 합쳐 손쉽게 순위를 올릴 수 있다. 점유율은 다시 부품업체의 ‘구매력(Buying Power)’으로 이어진다. 생산 원가를 줄이는 게 하드웨어 업계의 특명인 상황에서 PC 주문량이 많을 수록 제조 원가를 낮출 수 있다. 이는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으로 이어져 결국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 글로벌 ‘톱10’ 업체가 점유율에 집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속도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 사례가 애플이다. 애플의 점유율은 2%에 불과하다. 애플이 선택한 전략은 틈새 시장과 속도였다. 제품 출시 시기를 지금보다 더 앞당기고 과감하게 틈새로 방향을 틀었다. 이 결과 올해 매 분기 20%라는 기록적인 성장세를 이뤄냈다. ‘애플 마니아’라는 말을 만들었고 디자인만큼은 최고 기업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세계 PC 시장 점유율이 1%도 안 되는 국내 PC 업체의 생존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 ‘속도’다. 규모를 갖춘 기업이 속도를 내기 전에 국내 기업에 먼저 가속도가 붙어야 한다. PC시장 격변기, 생존 방법은 남들이 한 발짝 걸을 때 두발 씩 뛰는 것이다. 강병준기자@전자신문, bjkang@etnews.co.kr
◆ “빅딜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는?’ 2005년 레노버가 IBM PC 부문을 인수하기 전, 시장조사 업체는 2007년까지 최소 3개 글로벌 업체가 시장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다. IBM·게이트웨이 2개 업체가 매각돼 이 예언은 결국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하지만 아직 한숨을 돌리기는 이르다. 2007년은 끝나 가지만 여전히 PC 시장은 재편 중이다. 글로벌 PC 시장의 구도는 ‘2강 3약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델과 HP가 불과 1% 안팎으로 피말리는 ‘1위 다툼’을 벌이고 이 뒤를 레노버·에이서·도시바가 잇고 있다. 1·2위 업체의 시장 점유율은 각각 17∼18%. 3∼5위 까지는 4∼7% 수준이다. ‘글로벌 톱10’ 중 나머지인 5위 이하는 4% 이하로 사실상 점유율의 의미가 없다. 5위권 이하는 언제든지 인수·합병에 노출된 상황이다. PC 수요는 2000년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주춤했다가 다시 생기가 돌고 있다. 2003년 이후 올해까지 출하량으로 10%, 매출로 5%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는 2008년까지를 ‘PC 빙하기’로 보고 있다. 이는 3∼4년을 사이클로 하는 PC 교체 주기와 맞물려 있다. 일반적으로 대략 데스크톱 PC는 매 4년마다, 노트북은 매 3년마다 교체된다. 2000년 이후 2004∼2005년 말까지 PC가 업그레이드됐다. 이어 2008년까지는 특별한 수요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내년까지는 여전히 PC 시장은 먹구름이며 누구나 시장에 ‘매물’로 나올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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