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탑파의 의의
인도탑의 기본형식
한국탑파의 기원
삼국시대의 양식
통일신라시대의 탑파
통일신라 하대의 변형과 이형 석탑 출현
고려와 조선시대의 탑파
맺는말
석가가 입멸한 지 백년이 지나 대인제국(大印帝國)을 건설한 마우리아(Maurya)왕조의 아쇼카왕(BC 273~232)은 불사리를 안치한 8탑을 발굴하여 불사리를 다시 8만 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널리 사리탑을 세웠다고 중국의 佛典은 전하고 있다. 물론, 8만 4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 이러한 전승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信心 깊은 아쇼카왕이 넓은 지역에 많은 탑을 일시에 건립한 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며 인도 각지에는 아쇼카 시기에 까지 기원이 올라가는 스투파들이 많이 남아 있고, 간다라에서도 탁실라의 다르마라자카 대탑이나 스와트의 붓카라 대탑이 그러한 예들로 확인되었다.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 때의 불교 중심지였던 산치(Sanchi)에는 지금도 거대한 불탑이 남아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치탑’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4대 탑문(塔門)과 주위 난간의 조각들이 아름답고 또한 가장 오래 된 불탑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세계 제1의 탑파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불타의 입멸 후 신자들이 진신사리를 탑 속에 안치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 공양하였으나, 불교가 널리 퍼지고 탑파가 더욱 많이 세워짐에 따라 극히 한정된 불타의 진신사리로는 많은 탑을 만들지 못하여 불타의 머리카락(佛髮)․불타의 손톱(佛爪)․불타의 이(佛齒) 등을 봉안 예배하거나 불타의 옷(佛鉢)이나 좌구(坐具)등의 유물로써 불타를 상징하는 本尊으로 공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세에는 이것마저도 그 眞僞를 가려낼 수 없게되자, 절대로 변함이 없는 불타의 유적지인 탄생지(Lumbini)․초전법륜지(Sarnath)․성도지(Buddhagaya)․열반지(Kusinagara)등 4대 성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그곳에 탑파를 건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영장(靈場)․古蹟을 표시하는 기념탑적인 것을 지제(支堤, Caitya)라고 하여 불사리를 봉안하는 탑과 구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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