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시사의 불후의 업적인 〈님의 침묵〉을 펴냈고, 한국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강점기의 혁명적인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본관은 청주(淸州). 속명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용운은 법명이며 득도할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한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戒)를 받아 승려가 되었고, 이후 수년 간 불교활동에 전념했다. 이즈음에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다양하게 수용했으며, 1908년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의 통합을 꾀한 이회광 등의 친일적인 불교행위를 규탄·저지했다. 1913년 박한영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했고 1917년 8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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