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추후전망
국제사회의 축복 속에 독립을 인정받긴 했지만, 보스니아는 3년 넘게 전란을 치르면서 만신창이가 됐다. 큰 그림으로 보면 세르비아계 대 보스니악-크로아티아계의 전쟁이었다. 초기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계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 진행됐다. 벨그라드의 밀로셰비치 정권은 보스니아 지역내 정부군의 무기를 모조리 세르비아계에 넘겨주었다. 그렇게 해서 8만에 이르는 세르비아계 무장병력이 생겨났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깃발 아래 뭉친 이들의 목표는 다른 종족들을 몰아낸 뒤 이웃 세르비아(유고연방의 중심지인 벨그라드 정권)와 합쳐 ‘대(大)세르비아’를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내전 초기 세르비아계는 우세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보스니악(보스니아 회교도)과 크로아티아인들을 쫓아내거나 강제수용소에 가두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국토면적의 70%를 세르비아계가 차지했고 크로아티아계는 20%를, 보스니아 회교도들은 수도인 사라예보 지역과 그 나머지 지역에 근거를 두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말할 때 회교도들 사이에 ‘인간 도살자’로 불리던 아르칸이란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유엔의 추산으로는 보스니아 내전에 약 2만명의 세르비아 민병대가 참전했는데, 아르칸은 그 지도급 인물로 꼽혔다. 극단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인 아르칸의 본명은 젤리코 라드나토비치. 벨그라드 축구구단의 구단주로 여러 이권사업에 손대면서 밀로셰비치의 손발 노릇을 해온 벨그라드 비밀경찰과 가까이 지내왔다. 아르칸은 발칸에서 전쟁이 터지자, 실업자와 거리의 깡패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킨 뒤 ‘호랑이’ 민병대를 조직했다. 나중에는 독자적인 언론매체를 통해 신병을 모집하기도 했다. 세르비아 경찰과 유고연방군(세르비아군)이 이들에게 탱크와 대포를 대주었다. 그후 이들은 비(非)세르비아계에 대한 무차별 살육, 강간, 강도행위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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