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결론 1. 생애와 시대배경
성은 묵(墨)이요 이름은 적(翟)이다. 생존연대는 확실하지 못하나 대체로 기원전 479-381년 혹은 기원적 약468-376으로 추정된다. 노나라의 천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는 초기 周나라 때의 전통적인 제도 예악과 문물을 동경하여 논리적으로 이들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하려고 힘썼던 반면, 묵자는 그 제도 등의 타당성과 효용성에 회의를 품고 이들을 좀 더 유용한 것으로 대치시키려고 하였다.
주대 봉건체제하에서 왕 제후 대부들은 각각 자기의 군사적 전문가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周末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이 군사전문가들은 각기 흩어져 사용자에게 봉사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부류의 인물들을 士, 또는 武士라고 했다. 묵자와 그 제자들도 무사출신이었다.
2. 興利
묵자의 중심사상은 天下의 이익을 일으키는데 있었다(興天下之利). 이익(利)이란 사회의 이익을 가리키므로 그 기원문제는 바로 '어떻게 사회생활을 개선할 것인가?'가 되었다. 그러므로 묵자 학설에서 제일 중요한 맥락은 功利主義였다. 공리주의의 관념으로부터 非樂 非功說이 나왔고, 권위주의적 관념으로부터 天志 尙同說이 나왔다. 그러나 이 두 가닥의 주요 맥락은 모두 兼愛說 중에 모여지게 되었다.
3. 兼愛
묵자는 천하의 혼란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혼란의 근원을 살펴야 한다고 여겼다. 묵자는 원인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없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즉 임금과 신하가 서로 아끼지 않고, 아버지가 아들을 섬기지 않고, 가족과 국가가 서로를 아끼지 않는 데에 혼란의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묵자는 이의 해소를 위해 '兼相愛'說을 주장하였다. 겸애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묵자는 인간충돌의 근본원인을 서로 사랑하지 않음(不相愛)을 '서로 겸하여 사랑함'(兼相愛)으로 직접 전환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兼愛는 묵학의 대표개념으로 이해되어 진다.
겸애를 주장하는 것은 혼란을 평정하고 인정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겸애의 목적은 다분히 실용적이다. 그러므로 겸애의 주장은 반드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주장으로 제출된 것이었다. 겸애의 실현가능성에 대한 묵자의 입장은 단호하다.
用而不可, 雖我亦將非之 <兼愛上>
사용해 보고 안되는 것이면 비록 나라도 역시 그것을 그르다고 여기겠다.
즉 사용해보고 안 된면 포기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효과를 거둘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런 실효적 관점에서 묵자의 공리주의적 사상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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