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신라의 왕
신라의 명칭
신라의 성립
신라의 발전과 전개
신라의 사회, 경제
신라의 문화
신라의 멸망
신라의 성곽
통일신라의 성곽
신라고분
신라의 불교
신라의 탑
<발해>
발해의 왕
발해의 명칭
발해의 성립
발해의 발전과 전개
발해의 문화
발해 고분
발해의 탑
신라와 발해(성립,발전,사회,경제,문화,)
<신라>
신라의 왕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왕은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왕의 순으로 변하였다.
이 중 거서간과 차차웅은 함께 쓰였다. 거서간은 군장을 의미하는 듯하며, 차차웅은 무(巫, shaman)를 뜻한다. 이는 초기 신라의 정치적인 군장은 제사장의 성격이 짙었음을 말해준다. 이 단계에서 경주평야 일대의 여러 집단들은 강한 정치적·군사적인 결집력을 지니지 못하였고, 각 읍락(邑落)들에는 농업 공동체적인 성격이 아직 상당히 남아 있었다.
이사금은 연맹체 내 유력 집단들의 장(干)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루어지는 동의에 따라 세습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선임되기도 하였다.
다음은 4세기 후반 이후의 마립간 시대이다. 마립간은 대군장(大君長)이란 뜻으로 풀이되며, ‘매금(寐錦)’이라고도 하였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서 신라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대내적으로는 김씨 세습 왕권이 확립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국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6부 집단에 대해 왕실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철제 농기구의 대량 보급, 우경(牛耕) 등 향상된 농경기술의 보급, 수리시설의 확충 등에 의해 생산력이 증대되어나갔다.
대외적으로 신라는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의 남진에 따라 일시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이어 6세기 초 이후 마립간을 왕(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 사로(斯盧),사라(斯羅),신라 등으로 칭하던 국호를 이때에 와서 신라로 확정하였다. 나아가 17관등제가 정립되었고 관료조직이 확충되었다. 성문법인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를 공인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 해피레포트는 다운로드 받은 파일에 문제가 있을 경우(손상된 파일/설명과 다른자료/중복자료 등) 1주일이내 환불요청 시 환불(재충전) 해드립니다.
(단, 단순 변심 및 실수로 인한 환불은 되지 않습니다.)
· 파일이 열리지 않거나 브라우저 오류로 인해 다운이 되지 않으면 고객센터로 문의바랍니다.
· 다운로드 받은 파일은 참고자료로 이용하셔야 하며,자료의 활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운로드 받은 회원님에게 있습니다.
저작권안내
보고서 내용중의 의견 및 입장은 당사와 무관하며, 그 내용의 진위여부도 당사는 보증하지 않습니다.
보고서의 저작권 및 모든 법적 책임은 등록인에게 있으며,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저작권 문제 발생시 원저작권자의 입장에서 해결해드리고 있습니다. 저작권침해신고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