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소태산의 초기 찬술문건
Ⅱ. ■감응편■의 체재와
원본 ■태상감응편■
Ⅲ. 소태산 ■감응편■의 내용구조와 성격
1. ■감응편■
2. ■소태산 법문■
Ⅳ. ■태상감응편■의 구체적인 선악 결산서 - 공과격
{원불교교사}에서는, [원기 2년(1917.정사) 이래로 대종사 종종 김성섭에게 붓을 잡으라 하시고, 친히 수 많은 문자와 시가 등을 읊어 내어 기록케 하시고, 편집하여 [법의대전]이라 이름하시었다. … 이 밖에도 백일소.심적편.감응편 등의 저술과, 봉래산에서 지으신 회성곡이 있었으나, 그도 다 불사르게 하심으로써 후세에 남지 못하였다.]라고 하여 소태산의 저서에 '법의대전'외에도 '백일소', '심적편', '회성곡', '감응편' 등이 더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원불교교사}와 유사한 저서를 전하는 문헌으로는 1940년 1월 간행된 {회보}62호에 실린 원산 서대원(1910-1945)의 [종화록(일)]을 들 수 있다.
[종화록이라 함은 즉 대종사의 시화록이라는 약칭이다 ... 당시의 친저 문자로는 백일소, 심적편, 법의대전, 감응편, 회성곡 등 기타 수다한 책자가 있엇으나 이는 다 음부시대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 하야 전부 걷우어 친히 부화하섯다하는 바 하행 약간의 여적이 있어 좌에 소개하기로 한다.…]
라고 하여 그것을 확인해 주고 있다. 소태산 친저의 '법의대전'은 그 서문 첫절과 11구의 시구가 {대종경} 전망품 2장에 전하는 바이며, '회성곡'은 범산 이공전의 {대종경선외록} [대종사가사편]에 소개되어 있으나,'백일소'와 '심적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소태산 친저로 알려진 '감응편'은 소태산이 당시 직접 불살라서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원불교교사}는 전한다. 그런데 근년에 발굴되어 소태산의 부인인 양하운 대사모가 비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구전에 의하여 소태산이 {감응편}을 부인인 십타원 양하운(1890-1973)에게 전해주었다고 한 바도 있으므로 {감응편}은 앞의 [종화록]이나 {원불교교사}에 언급된 소태산 찬술의 {감응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소태산이 교강제정을 전후로 친히 불살라 전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초기교단의 소태산 친저의 여러 문헌들이 상당부분 현재까지 전해지는 셈이다.
흔히 도교를 구분할 때, 교단을 이루고 전승되는 종교결사체로서 성립도교(교단도교), 국가의 관공서나 궁중에서 유행하는 형태의 궁중.관방도교, 그리고 재초의례를 중시하는 과의도교, 고도의 수련이론체계를 갖추고 탈속하여 불로장생의 신선을 목적으로 한 수련도교, 사회 저층민을 대상으로 유포되는 소박한 신앙형태의 민간도교 등으로 나뉜다. 한국의 경우 성립도교를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유입되어 흥행하였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과의와 재초 중심의 도교가 과의도교, 궁중.관방도교였으며, 김시습으로부터 본격화된 조선시대 단학파들이 수련도교를 형성하며, {태상감응편}.[공과격]과 함께 조선후기에 유행된 민중신앙이 민간도교이다. 따라서 소태산찬 {감응편}은 민간도교의 {태상감응편} 유행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유행했던 {태상감응편}이 원불교 초기교단에도 상당 부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 한 예로 [화피초목 뇌급만방]이라는 구절이 민중도교 전적인 {태상감응편}으로 부터의 원용인데 소태산이 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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