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의 큰 발단의 사건으로는 노구교 사건과 남경대학살을 들 수 있다.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40분 북경서남쪽 10여킬로미터 떨어진 영정하에 걸려있는 노구교(루거우차오)의 동쪽편 완평현성 북쪽의 황무지에서 야간훈련 중인 일본군의 한 부대를 향해 현성 및 현성 반대쪽인 용왕묘 부근으로부터 몇 십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일본군은 곧바로 응전태세에 들어가 다음날 8일 새벽, 완평현성을 폭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9일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총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지나주둔군 특무기간과 천진시장 장자충 사이에 가까스로 정전협정이 성립되어,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9일 중에는 거의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도쿄에서 11일 오전, 당시 고노에내각은 각의에서 일본 본토로부터 3개사단, 조선으로부터의 1개사단, 만주로부터 2개여단을 파견한다는 강경방침을 서둘러 승인했다. 한편 7월 17일 장개석 군사위원장은 강서성 여산에서 성명을 발표하고(공표는 19일), 노구교를 잃으면 고도 북평이 제 2의 심양이 되고, 그렇다면 수도 남경도 북평의 운명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노구교 사건의 해결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이것이 최후의 경계이다라고 발표하였다. 7월 27일, 고노에 내각은 한 때 연기시켰던 일본 본토의 3개 사단 파병을 결정하고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 28일, 현지 일본군은 천진·북경을 중심으로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30일에는 영정하 이북의 북경·천진 일대가 거의 일본군에 떨어졌다. 8월전쟁은 다시 상해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이전 상해사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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