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이 정체됐다. 새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몇년 후 어떤 처지로 전락할지 모른다. 기존 사용자를 지키고 차세대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신규사업을 벌이기에는 규제가 너무 많다. 진입해도 여러 기관이 이런저런 이유로 중복 규제해 옴짝달싹하기 힘들다. 정부의 소비자 보호 정책에 따라 요금인하도 해야하고 경쟁사를 위축시켜서도 곤란하다. 이 모든 요인들을 감안하면서 성장의 돌파구를 찾는게 과연 가능할까. 다가오는 선거철에는 또 어떤 정치 논리가 튀어나올까’
통신업체의 고민이다. 통신업계는 요즘 유무선, 선후발 할 것 없이 심각한 위기를 느끼고 있다. KT는 시내전화에서 매년 3000억원에 가까운 적자가 난다. VoIP 등 대체 서비스로 인한 위기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SK텔레콤의 국내 가입자 2000만명 돌파는 이제 자랑이기보다는 고민이다. 막혀있는 벽을 향해 다가가는 형국이다. 최근 상승세를 탄 LG ‘3콤’이나 HSDPA ‘올인’을 외친 KTF 역시 불확실한 대외변수에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포화할대로 포화한 유선시장 후발인 하나로텔레콤 등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내수시장의 성장세에 안주해 글로벌 사업을 재빨리 준비하지 못한 것도, 가입자 확보를 둘러싼 출혈 마케팅 경쟁의 후유증도 업체 스스로 만든 면이 없지 않다.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할 책임 역시 사업자에게 있다. 문제는 그러기에 통신사업자들의 운신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사업자 스스로 풀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 즉 정부 규제이기 때문이다. 지배적 사업자들의 경우 아직도 요금이나 사용약관에서 정통부 규제를 받는다. 요금을 결정하는 것은 수급 상황에 따라 사업자 스스로 결정할 사안이지만 사실상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내년에 시행하는 지배적 사업자의 결합상품 출시도 사실 허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지만 할인율이나 결합방향은 여전히 정부 손바닥 위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 단체 등 외부 기관에 의해 들어오는 요금인하 압력에 대해 여론에 밀려 수긍하는 웃지못할 일이 빚어지고 있다. 선거때가 되면 업체들이 심리적 부담을 더욱 크게 커진다. 이동통신 분야에서 이뤄져온 번호이동 시차제, 단말기 보조금 등의 현안도 사실 균형적인 경쟁정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후발사들의 입장이 상당 부분 반영됐다. SK텔레콤의 한 관계자는 “통신시장에 규제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합리적인 마케팅을 벌일 정도는 돼야 한다”며 “후발사업자들이 과거처럼 절대 약자가 아닌 만큼 인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책 우산은 유무선 선발업체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뿐만아니라 수혜자인 후발사업자들에게도 지속생존을 위한 경쟁력 확보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됐다는 평가다. 유선 업체들은 무선과의 규제 형평성 문제를 지적한다. 1개의 역무로 구분됐고 주파수 접근으로 경쟁제한이 여전히 유효한 무선 시장과는 달리 유선은 7개 역무로 세분화해 규제가 촘촘하다. 보편적 서비스나 망개방의 의무도 유선에만 부과하는 것은 지나친 부담이라는 것이다. KT의 한 관계자는 “지난 11일 공청회에서도 나왔듯이 유무선 역무를 통합하고 이통시장에도 간접 접속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젠 규제를 통해 시장을 ‘통제’하려는 정책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융합 트렌드를 규제라는 틀에 담을 수 없을 뿐만아니라 시장활성화, 경쟁촉진, 지속투자, 글로벌 전략 등 향후 과제 어느 것 하나도 현재의 규제만으로 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책논리가 시장논리를 좌우할때 결국 정책실패와 시장실패를 동시에 안게 된다”며 “시장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정부가 유도하고 특별히 문제가 있을 때는 사후규제를 통해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IT전략 컨설팅사인 오범의 크리스 다인스 회장 역시 지난달 초 한국을 방문해 “정부는 요금이나 접속료에 개입하지 말고 시장에 맡겨야 하며 주파수 정책도 최대한 민간 자율성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조인혜기자@전자신문, ihcho@
◆외국 규제완화 사례 미국·영국·일본 등 선진 국가들은 규제기구 통합과 새 규제체계 정립 등을 통해 통신과 방송 융합 등 급변하는 통신시장 환경에 대처해나가고 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규제완화를 통해 산업활성화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커뮤니케이션법’을 제정한 영국은 ‘최소한의 규제원칙(Light Touch Regulation)’을 천명했다. △지상파 민영방송인 ITV의 독점 소유금지 철폐 △1개 이상의 전국 라디오 민방소유에 대한 금지 철폐 △이종매체 간 교차소유 금지 철폐 △비유럽 외국 자본의 투자 허용 등 각종 소유 규제를 철폐했다. 무엇보다 경계에 걸친 신규 서비스에도 똑같은 룰에 따라 최소한의 규제만을 가한다는 원칙을 마련했다. 이어 2003년 12월 통신과 방송을 모두 관장하기 위해 기존 5개 규제기관의 전권을 이양받은 거대조직 오프콤(OFCOM)을 출범시켰다. 이후 영국은 어느 나라 보다 빠르게 IPTV 등의 컨버전스 서비스를 도입했다. 영국 내 약 2만여 가구가 IPTV에 가입 중이다. 미국은 매체간 경계를 허물고, 소유규제 완화를 통한 경쟁촉진 등 기존의 커뮤니케이션법을 대폭 개정한 텔레커뮤니케이션법을 발표하며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대응했다. 경쟁체제 도입을 통한 소비자 복지 증진이 궁극적인 지향점이었다. 최근엔 통신과 방송의 융합환경을 대비해 새 개정안을 준비중이다. 개정안에는 광대역인터넷 서비스와 인터넷전화(VoIP) 등에 대한 내용을 모두 포함할 전망이다. 지난해 공개된 텔레커뮤니케이션법 개정안 초안은 통신산업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도 방송사업자의 통신 진출과 통신사업자의 방송 진출 등 상호진입을 허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케이블TV 사업자의 전화시장 진출과 통신사업자의 IPTV 시장 진입이다. 일본 총무성은 통신사업자의 방송시장 진입을 위해 2001년 전기통신역무이용방송법을 만들어 이듬해 시행했다. 독일도 통신 역무에 있어 최소한의 규제와 자율규제를 제정한다는 공감대를 마련했다. 융합서비스를 연방정부가 규제하지만 시장의 논리에 맡겨야한다는 게 공통인식이다. 프랑스는 지난 2004년 융합에 대비해 전자커뮤니케이션법을 제정하면서 네트워크와 콘텐츠 규제를 분리했고 특히 통신분야의 규제를 대폭 완화한바 있다. 완화가 경쟁을 촉진하고 그 결과 이용자 복지가 늘어날 것이라는 통신 규제 철학이 이제 대세다.
◆규제 로드맵 만드는 정통부 정보통신부는 올 연말까지 통신시장 규제제도 개선방안을 도출해 새 규제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밝혀왔다. 이는 노준형 정통부 장관이 취임과 동시에 밝힌 계획이기도 하다. 예측가능한 규제 정책을 펴서 사업자들이 미리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노장관은 취임 이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환경의 변화에 맞춰 통신 시장 발전의 선순환구조를 새로 정립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며 “통신사업자 스스로가 역량을 강화하고 소비자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경쟁정책 방향을 재정립하고 시장의 자율과 창의가 최대한 발휘되도록 규제정책의 예측가능성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장관은 국감에서도 “금년 중 통신규제 개선 로드맵을 제시해 통신사업의 활력을 제고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최근 국내 통신시장은 가입자 포화로 성장이 정체됐으며, 시장을 둘러싼 환경도 기술발전에 따른 △유무선통합 △통신과 방송의 융합 등 급변했다. 새 규제 로드맵은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은 규제철학을 바탕으로 통신시장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정통부가 내놓을 새 규제 로드맵의 핵심은 규제완화와 경쟁촉진이다. 이를 위해 현재 서비스별로 분리된 규제체제를 수평적 규제체제로 개편할 전망이다. 로드맵에 담길 주요 내용은 결합서비스, 역무분류, 망 중립성 원칙, 재판매제도 등으로 알려졌다. 정통부는 10년 이상 지속된 현재의 규제정책을 바꾸고, 사안별로 사업자들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최종 로드맵 마련에 심사숙고했다. 정통부는 규제 로드맵 초안이 마련되면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공청회 등을 거친 후 최종 로드맵을 확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통신 사업자들은 “규제 일정을 명확히 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어느 통신 규제 정책에서도 나오지 않은 진일보한 조치”라고 환영하면서도 “다만,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할 때 시장 논리를 더욱 반영해야 하며 그럴 것으로 믿는다”고 밝혔다. 권건호기자@전자신문, wing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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