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의 금남표해록에 관한 자료는 얼마없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최부의 생애에 금남표해록의 내용을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본문일부/목차
1.지은이 소개-`최부는 누구인가?“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자(字)는 연연(淵淵)이고, 본관은 탐진(耽津), 나주 태생이며 진사 택(澤)의 아들로 1454년(갑술)에 출생하였다. 24세 때 진사시에 세 번 째로 합격하였고, 29세(성종 13년, 1482)되던 해 봄, 성종이 성균관 문묘 참배 후 인재를 골라 쓸 때에 그는 정통책(正統策)으로서 답안을 올려 제삼(第三)에 등재하였다. 이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 재주와 명망을 크게 떨쳐 경향간에 알려졌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에 임하였다. 그는《동국통감》(東國通鑑)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지은 백여 수가 넘는 동국통감론은 논설이 명백하여 그 당시 여론에서 그의 재지에 대한 기대가 컸었다. 1486년에는 중시(重試)에 아원(亞元)으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날로 올라 사헌부 감찰(監察)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을 지내다, 얼마 후에 수찬이 되었으며, 1487년에는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그 해 9월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의 임무를 띠고 제주에 갔다. 그런데 다음해인 1488년 윤정월에 부친상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 나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중국 태주(台州)에 표착, 그해 7월에야 환국,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하였다. 그 때 임금의 명으로《표해록》을 찬술하여 올렸다. 그 후 연이어 모친상을 당하였다.
1492년에 상기(喪期)를 마친 후, 간관(諫官)인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앞서 부친상 때 임금의 명에 응하여 표해록을 찬술한 것을 두고, 일부에서 트집을 잡고 논박하였다. 성종은 일부의 비난을 심각하게 여겨 선정전(宣政殿)에서 친히 최부에게 표류한 전말을 하문하였다. 최부의 자세한 진언을 끝까지 들은 성종은, “공은 발섭사지(跋涉死地)하면서도 국위선양을 유감없이 잘 하였다”하며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 해에 서장관(書壯官)의 직책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으며, 1493년 봄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字侍講院文學)에 임하였고, 4월에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대관(臺官)들이 또다시 앞서 있었던 일을 트집을 잡자, 홍문관의 여러 학사들이 성종에 아뢰기를, “최부는 연상(連喪) 4년에 한 번도 집에 가지 않고 여막에서만 수상(守喪)한 사람으로 효행이 탁이(卓異)합니다. 동료들과 함께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진언하였다.
성종은 공경들과 논의한 후, 5월에 승문원 교리를 제수하였다. 1494년 5월에는 다시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고, 8월에는 부응교(副應敎) 겸 예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예문관 응교는 파격적인 등용으로 장차 대제학의 재목이 아니면 그런 영광을 얻을 수 없었다. 1495년 봄에 생원회시참고관(生員會試參考官)이 되었는데, 명참고관으로 알려졌다. 1496년 5월 호서지방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연산(燕山)은 최부를 호서에 보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제조 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9월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고, 11월에 상례(相禮)에서 사간(司諫)으로 이동하였다. 1497년 2월에 최부는 연산의 실정을 극간(極諫)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으며, 공경대신들을 비난하였다. 이에 다시 상례로 좌천되고 질정관(質正官)으로 북경에 다녀온 후, 그 해 가을에 예빈정(禮賓正)이 되었다. 좌천의 이유는 모든 권세가들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로서 1498년(무오)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났을 때,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가택을 수색당하였다. 그런데 유독 최부만《점필재집》(佔畢齋集)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것을 이유로 고문을 당하였으며, 장형(杖刑)을 받고, 단천(端川)으로 귀양갔다. 1504년 4월에 연산의 명으로 다시 옥에 투옥되고 사형에 처해졌다. 처형되던 전날 밤, 김전(金詮), 홍언필(洪言弼)등도 경죄(輕罪)로서 같은 옥에 구금되었는데, 참형을 앞두고서도 태연하게 술을 준비하여 그들을 전별해 주었다 한다. 그 때 최부의 나이 51세였다. 그 후 1506년에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포부와 경세제민의 재능을 백분지 일도 펴보지 못하고 비운을 만나 끝내는 죄없이 죽고 말았으니, 그 당시 사림(士林)들은 몹시 애석해 마지않았다 한다. 후세에 소설가 이병주(李炳注)는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민족의 역사를 수 놓은 기라(綺羅)와 같은 성좌(星座)가운데 한결 영롱하고 애절한 이름이 있으니 금남 최부 선생이다. 그 영롱함은 탁월한 재질과 염결한 성품으로, 성충(誠忠)으로 나라에 봉사하고 열성으로서 후학을 훈도한 공적으로서 빛나는 것이오, 그 애절함은 천부의 능력, 만장의 기염을 펴지 못하고 50년의 짧은 생애를 형사(刑死)로서 매듭지었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민족의 한은 역사의 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지만 금남의 생애와 행적을 살피게 되면 특히 그 한이 애처롭다. 어찌하여 이러한 대재(大才)를 민족의 거목으로 가꾸지 못했던가. 어찌하여 위국(爲國)의 성충을 나라 전체를 광피하도록 받들자 못했던가. 그러나 《표해록》 한 권을 남긴 것만으로도 우리들에겐 지행(至幸)이었다. 수백 수천의 기행(紀行) 가운데서 《표해록》은 단연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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