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의 고승으로 성은 김씨이다. 처음의 법명은 견명(見明). 처음 자는 회연(晦 然), 자호는 목암(睦庵).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출신으로 김 언정(金彦鼎)의 아들이다.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光州) 지방인 해양(海 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 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36년 10월 몽고의 침입이 일어나 병화가 전주 고부(古阜)지방까지 이르자, 병화를 피하고자 문수(文殊)의 오자 주(五字呪)를 염하면서 감응을 빌었다. 문득 문수가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있다가, 명년 여름에 다시 이 산의 묘문암(妙門庵)에 거처하라.`고 하였다. 이 에 곧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항상 `생계(生界), 즉 본질적인 세계는 늘지 아니한다(生界不滅 佛界不增).`는 구절을 참구(參 究)하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오늘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포산․남해․윤산 등지에서 전란을 피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다. 강화도의 선월사 (禪月社)에 머무르면서 설법,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의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으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 을 감화시켰다. 1277년(충렬왕 3)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 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때에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2년 가을 충렬왕의 간곡한 부름 으로 대전에 들어가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면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 경충조(圓經庶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이해 4월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 衣禮 : 옷의 뒷자락을 걷어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봉양이 마음에 걸려 몇 차례에 걸친 왕 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 아래에서 모시고 봉양하던 어머니 가 1284년에 죽자, 조정에서는 군위 화산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1289년 6월에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 게 올릴 글을 쓰고, 8일 새벽 선상(禪床)에 앉아 제자들과 선문답(禪問答)을 나눈 뒤 거처하던 방으로 돌아가서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화록(話錄)>2권, <게송잡저(偈頌雜著)>3권, <조파도(祖派 圖)>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 <제승법수(諸乘法數)>7권, <조정사 원(祖庭事苑)>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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