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반도체산업은 8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그 무게 중심이 아시아로 기울었다. 당시 아시아 각국은 D램 생산에 초점을 맞춘 종합반도체업체(IDM)를 지향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대만은 파운드리서비스라는 하청(?) 구조의 반도체사업으로 전환했고, 한국은 IDM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 결과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선택은 ‘메모리반도체 세계 최강 한국과 파운드리 중심의 시스템반도체 강국 대만’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실제로 한국은 메모리에서 일가를 이루며 세계 반도체업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메모리강국의 명성 뒤에는 전체 한국 반도체산업계에는 아쉬움으로 남는 그늘이 존재한다. 세계 반도체산업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시장에서의 ‘패배 아닌 패배’가 그것이다. 더욱이 세계 반도체업계의 제조방식이 IDM에서 파운드리·팹리스로 점차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팹리스 반도체업계의 발전 근간인 국내 파운드리산업은 침체됐고, ‘새로운 기회의 상실’로 까지 이어지고 있다. 팹리스 반도체업계 한 CEO는 “솔직히 현 단계에서는 국내 파운드리가 대만·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많은 팹리스들 이 기술과 서비스가 해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지는 한국을 뒤로하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반도체공동연구소 김형준교수는 “파운드리산업은 더 이상 반도체 산업의 하부구조가 아니며 그 자체로 반도체 산업을 리드할 수 있는 힘을 갖기 때문에 지금을 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최근 (파운드리산업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는 대만의 반도체산업 발전사에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엠텍비젼·코아로직 등 세계를 무대로 뛰는 토종 팹리스가 잇따라 탄생하면서 파운드리산업의 필요성은 한층 강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수백 개의 팹리스 벤처가 생겨나면서 팹리스반도체산업이 바야흐로 하나의 산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했고, 그 주역들이 한국 파운드리산업 육성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고 있다. 황기수 코아로직 사장은 “디지털컨버전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반도체설계산업은 성장의 호기를 맞고 있다”며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파운드리산업 육성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김달수 TLI사장은 “국내 파운드리가 IP가 부족하고 기술이 없다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는 해외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모든 산업이 마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며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이 파운드리업체와 협력하면서 경쟁력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는 동부아남반도체·매그나칩반도체·삼성전자 등 3개 업체가 파운드리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순수한 파운드리 기업은 동부아남반도체 뿐이다. 파운드리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늘고 있으나 국내 상황은 최악인 셈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대만·중국의 파운드리업계가 국내 팹리스 반도체업계를 겨냥해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규모경제’의 실현으로 국내 파운드리에 비해 가격·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이들의 공세는 한국 파운드리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단순히 파운드리서비스를 대만·중국에서 받는다는 문제를 넘어, ‘기술유출’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조중휘 차세대반도체성장동력사업단장은 “국내 팹리스들은 공정개선의 신속성·용이성·적기생산·기술 및 영업기밀 보안성 등 때문에 아직은 해외 파운드리업체보다 국내 파운드리를 선호한다”며 “그러나 국내 파운드리의 기술과 서비스 수준이 해외에 비해 계속 밀리게 되면 국내 팹리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은 가속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팹리스와 파운드리 간 기술 협력이 절대적인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한 번 해외로 나간 팹리스업체를 국내로 다시 끌어들이기는 쉽기 않다. 차라리 해외 파운드리 이용 비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결국 국내 파운드리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는 산자부, 정통부는 물론 청와대까지 나서 국내 파운드리서비스 활성화에 팔을 걷어 부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반도체업계 주도의 새로운 파운드리 팹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고, IP개발·공정개발·SoC(또는 시스템IC) 설계 지원 프로그램 등과 연계한 산학연 공동의 국내 파운드리 육성책도 고려하고 있다. 김형준교수는 “시스템반도체 육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경쟁력을 갖춘 파운드리 전문업체는 국내에 꼭 존재해야 한다”며 “대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최고 수준의 파운드리서비스를 확보하는 것은 국내 팹리스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칩 제작지원서비스, 팹리스 사업화 단초 제공. 국내 팹리스반도체산업이 걸음마를 시작하던 2001년. 현재 코스닥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팹리스업체의 상당수는 정부와 유관기관, 그리고 파운드리서비스업체들이 함께 진행하는 ‘시제품 제작지원서비스’를 한두 번씩 거쳤다. 이 사업은 반도체생산라인(팹)이 없는 중소·벤처업체들에 정부가 일정의 지원비를 대고 시제품 제작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연구개발을 활성화하고 가능성 있는 기술들에 대한 상용화 길을 터준다는 것이 목적이다. 지난 2001년부터 산자부는 한 웨이퍼에서 복수의 샘플을 제작하는 멀티프로젝트웨이퍼(MPW) 사업을, 정통부는 한 웨이퍼에서 한 종류 샘플을 제조하는 싱글(양산)런 사업을 중심으로 진행해 왔다. 대표적인 칩 제작지원서비스인 ‘반도체혁신협력사업(MPW 등)’은 산자부에서 지원하고 반도체연구조합이 총괄 주관하는 사업이다. 중소 팹리스 및 시스템업체에서 설계된 반도체의 빠른 검증을 위해 2001년 시작된 이 사업은 2004년 말 현재 약 120건의 시제품이 제작됐고, 이 가운데 10% 이상 제품은 현재 국내외 휴대폰·TV·오디오 등에 실제 채택돼 팹리스의 매출원이 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시스템반도체 제품으로서는 선행기술인 0.13㎛ 공정까지 지원하면서, 실제로 팹리스들이 원하는 기술 제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도체연구조합 김휘원 과장은 “반도체 설계를 마치고도 이를 검증하지 못하는 중소·벤처업체들에게 힘이 되고자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이름없는 벤처가 이 사업을 거쳐 당당한 팹리스업계의 대표 주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4년간 많이 지켜봤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칩제작지원서비스는 정통부와 IT-SoC 사업단이 양산 직전의 샘플 제작을 지원하는 ‘싱글런’이다. MPW가 하나의 웨이퍼에 여러 개 회사의 제품을 설계해 생산하는 것과 달리 싱글런은 단일 제품만을 찍는 것으로 양산 제품 대상으로 실시된다. IT SOC사업단 장인수 선임연구원은 “엠텍비젼·코아로직 등을 포함해 지난 3년간 100건 이상(계약업체 기준)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인터뷰-동부아남반도체 송재인 상무 “파운드리 업체와 팹리스 업체간에 지식공유가 활발하게 이뤄져 모두가 승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동부아남반도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송재인 상무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회사와 파운드리가 현재보다 더 많은 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내 파운드리도 시스템반도체 회사도 모두 영세합니다. 시스템반도체 회사간의 연합체가 보다 공고해져서 이를 통해 서로 반도체 설계자산(IP) 공유작업이 이뤄져야 하고, 파운드리도 여기에 참가해 시너지 효과를 모색해야 합니다.” 외국의 파운드리를 이용하게 되면 결국 나중에 대량 생산에 들어갈 때 가격 인하가 안 돼 결국 제품의 원가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초기에 힘이 들더라도 국내 파운드리와 호흡을 맞춰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필요하다고 송상무는 밝혔다. 송 상무는 고가의 IP 확보를 위해서는 파운드리와 시스템반도체 업체간의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실적인 여건상 파운드리가 외국의 1등 업체처럼 모든 것을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시스템반도체 업체와 파운드리가 정부 등에 지원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송상무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서 업체들이 보다 현실성 있는 품목을 개발하고 이를 파운드리에 요구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국내 업체들의 설계 제품이 너무 미래지향적이라 상품화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국내 파운드리들이 소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장성을 강화한 제품 기획이 절실합니다.“ 이외에도 송 상무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업체들이 같은 품목을 놓고 과당 경쟁을 벌일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에서 경쟁력있는 주요 업체들이 너무 같은 품목에만 뛰어들어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이를 방지할 수 있도록 계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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