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패전의 충격 속에서 ‘잃어버린 90년대’를 보낸 일본 기업들이 세계 경제패권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나선 요즘 오히려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 있다.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 겸 CEO(67)는 2년 연속 실적 부진과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책임론으로 어깨가 무겁다. 올 초 경영방침설명회에선 “올해는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게 간다”고 까지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이데이 회장은 95년부터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디지털 희망 세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디지털 시대의 선봉에 섰다. ‘e소니’로의 변화도 주도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미처 적응을 못한 소니가 주춤거리자 세계 최고의경영자인 그로서도 고민이 컸다. 그러나 최근 소니의 횡보를 보면 이데이 회장이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국 정부와 업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삼성전자와의 대형 LCD 패널 합작, 셀(CELL)로 대표되는 반도체 대형 투자, 세계 최초의 HD(고화질) 캠코더 출시, 미 영화사 MGM 인수 등 중요한 사업적 결단이 이를 증명한다. 13명의 선배들을 제치고 사장 자리에 앉은 지 내년으로 10년. 당시 3000억엔 적자 상태에서 경영을 물려받았지만 바이오(오디오·비디오 스테이션 기능의 PC), 베가(평판 TV) 등의 신제품을 속속 히트시키며 사령탑에 앉은지 3년 만인 98년 대폭 흑자(2200억엔)로 전환시켜 놓았다. 흑자 폭이 2년 연속 감소됐다는 것만으로 이 인물을 평하기는 이르다. 단지 소니의 체질이 이제 정말 ‘하이테크 최강자’ 답지 않게 노화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뿐이다. 이데이 회장은 올 초 월간지 문예춘추 신년호에 기고한 글에서 “소니는 신화붕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며 ‘소니 위기설’을 반박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비전과 자신감은 무엇일까. 이데이 회장은 소프트와 하드가 만나는 소니의 미래상, 가깝게는 소니가 환갑을 맞는 2006년까지의 경영전략 등을 서면질의를 통해 들어봤다. -소니의 일거수에 일본 경제계가 떠들썩합니다. 소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소니는 일본의 변화를 위한 선두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각오로 50여년을 보냈습니다. 소니의 히트 상품은 그 당시 변화를 대변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일본 기업도 미국 기업도 아닌 소니만의 정신을 무기로 일본 경제를 이끌고 왔다고 자부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바람직한 기업 전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패러다임과 장이 바뀌었는데도 과거의 성공체험에 안주해 과거 방식을 고수하면 결과는 실패일 뿐입니다. 그 동안의 성공경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아키텍처(구조)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 대변혁기엔 과거식 구조를 해체하는 세력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는 이들을 ‘룰 브레이커(Rule Breaker)’라고 부릅니다. 최근의 마쓰시타전기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카무라 구니오 사장은 현명하게 과거 영광을 버렸고 새로운 기업상을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것에 집착해 스스로의 장점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과거 도시바는 진공판 TV시대의 최강자였습니다. 하지만 트랜지스터 시대로 바뀌자 도시바는 정상에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진공관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조직과 모델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죠. 지금 기업에 필요한 사람은 ‘이단아’들입니다. 조직원 개개인이 모두 룰 브레이커가 돼 기존 방식에 도전할 때 그 기업은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소니는 무엇을 파괴해서 무엇을 창조하려 하나요. ▲패전 후 일본에서 소니는 재미와 오락, 개인주의를 기업이념으로 추구했고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모델 자체가 바뀐 지금은 50년간 누적된 낡은 시스템으론 대응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제 임무는 소니의 낡은 구조를 파괴해 네트워크 시대에 맞는 새 구조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사장 취임 이후 줄곧 생각했습니다. 최근 소니의 개혁적인 행보가 이를 말해줍니다. -올 초 대대적인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셨습니다. 99년에 이미 한차례 인력조정을 단행한 바 있는데 실패였습니까. ▲이번에 발표된 구조조정안은 지난해 연말부터 계획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렉트로닉스, 게임 등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뜻입니다. 향후 3년간 직원 2만명을 감원한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소니의 사업부문은 너무 방대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를 조정하고 가전과 소프트웨어를 접목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99년 당시 공장 효율화가 중심이었고 간접 부문의 인력 조정은 거의 없었습니다. -소니의 영업이익이 2년 연속 격감했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휴대폰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와 가정에서 인터넷에 늘 접속할 수 있는 초고속 통신 등이 예상외로 너무 급속하게 보급됐습니다. 이런 변화를 내다보고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대가 너무 빨리 쫒아와 버린 셈이죠. 특히 고객지향에서 기술지향으로 너무 나가버린 게 실수였습니다. 예를 들어 디지털TV 화면 부문에선 유기EL과 같이 소자 자체가 빛을 내는 기술에 너무 집착했고 광디스크에선 DVD보다 그 이후 제품에 과도하게 힘을 쏟았습니다. -2006년까지 영업이익률 10%를 강조하셨습니다. 실현 가능한 목표입니까. ▲연간 기준으로 적자를 보고 있지는 않지만 제일 무서운 것은 지금의 저수익률에 익숙해져버리는 겁니다. 삼성전자 등과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선 10%의 수익률로 재투자하는 식이 아니면 안됩니다. -2002년과 2003년의 소위 ‘소니 쇼크’는 가전 부문 부진이 주요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AV기기 등 일렉트로닉스 부문에서 부진을 보인 것이 사실입니다. 최강의 상품을 만드는 소니의 기술력이 가전 이외 다른 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점에 동감합니다. 올해는 이미 디지털 카메라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18∼23%를 차지해 수위를 지키고 있고 LCD 및 PDP 등 평판 TV에서도 경쟁력을 급속히 회복하고 있습니다. -20억달러를 투자해 삼성전자와 LCD 합작사를 만들었습니다. 일본기업도 많은데 왜 하필 삼성전자였습니까. ▲소니는 전자산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회사고 삼성은 36년된 회사입니다. 둘다 가전산업에서 대규모 회사지요. 소니는 단독으로 LCD 패널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역시 삼성과 소니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현재 TV가 소니의 중요한 사업분야 중 하나며 한발 앞서 투자한 삼성의 TV용 LCD 패널이 안성맞춤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소니의 21세기 미래상은 무엇입니까. ▲소니는 전자·가전 제품 영역을 넘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유비쿼터스밸류네트워크(UVN)’를 21세기 소니의 자화상으로 잡고 이를 위한 혁신 방안들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구상은 장래에 소니가 단순 가전업체가 아닌 AV·IT엔터테인먼트·콘텐츠를 결합한 종합 IT기업으로의 도약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한마디로 소니의 미래는 영화와 음악·게임을 전자·가전과 결합시키는 종합 엔터테인먼트기업입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기업 변신을 위한 전략을 소개해 주시죠. ▲디지털가전, 소프트웨어, 디지털콘텐츠 등 3대 사업이 향후 소니의 핵심 비즈니스가 될 것입니다. 우선 다양한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레디(Ready) 제품 개발에 주력할 것입니다. 또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결합한 디지털 가전제품 개발을 통해 사업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계획입니다. 특히 네트워크 시대(Network Age)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서 종전 디지털 회사에서 네트워크 기업으로의 전환을 시도중입니다. 소비자들의 디지털 드림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와이파이(WiFi), 블루투스 기술을 접목한 무선 환경용 제품도 조만간 출시합니다. -올 경영방침설명회에서 ‘소니 스피릿’을 강조하셨습니다. 소니만의 강점으로 지적되는 자유분방함, 창의력, 벤처정신 같은 것은 어디에서 나오는지요. ▲원천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역시 창업자 ‘이부카’라는 독특한 인물과 만나게 됩니다. 이부카는 전쟁과 군대를 싫어했고 소니를 세울 때도 군대와 정반대의 회사를 구상했습니다. 그래서 집단주의가 배제되고 개인과 재미가 강조된 기업문화가 탄생한 것이죠. 명승욱기자@전자신문, swmay@etnews.co.kr
*소니의 차세대 전략은... 2005년 소니는 부활할 수 있을까. 세계 언론과 하이테크 업계는 “영업이익은 떨어지고 돈까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며 야단법석이다. 그러나 정작 소니는 대형 기업의 인수·신제품 개발 등으로 바쁘다. 소니가 당면한 최대 경영과제로 삼는 것은 실추된 가전분야에서의 ‘명예회복’이다. 베텔스만의 음악사업 통합, 삼성전자와의 대형 LCD 생산 합작, 미국 영화사인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 인수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최근 결정했지만 ‘소니’하면 뭐니뭐니해도 워크맨·TV 등의 가전으로 대표되는 업체이기 때문이다. 소니의 기본 전략에 대해 이데이 노부유키 회장은 “신제품을 대거 투입해 부활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니 두고 봐달라”고 자신했다. 이데이 회장은 컬럼비아영화사를 인수했던 지난 89년에 세계적으로 히트친 비디오카메라가 탄생한 점을 새삼 강조한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최근의 MGM 인수 발표를 전후해 소니는 디지털 TV급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내놨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기자들까지 불러 발표회를 갖고 대대적인 판촉에 나서고 있다. HD의 일상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이 제품에 거는 소니의 기대는 크다. 다무라 마사히로 아·태지역 담당 사장은 “소니의 독주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오는 2006년 출시될 ‘셀’ 장착 TV다. 셀은 소니가 도시바·IBM과 공동 개발하는 차세대 범용 프로세서다. 투자액만도 2000억엔에 달한다. 우선 플레이스테이션2(PS2) 후속 기종의 심장부에, 이어 TV에 셀을 장착한다. 게임과 TV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PC TV의 출현이 머지 않았다. 이데이 회장은 “셀은 소니 부활의 최대 카드”라고 기대한다. 차세대 DVD 규격 ‘블루레이’에도 관심이 더해진다. 미 양대 영화사 인수로 소니는 막대한 소프트웨어(SW) 자산을 손에 쥐었다. 이를 하드웨어(HW)와 합친 DVD 사업에 활용한다.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진 PS 2에 블루레이를 채택하면 DVD 세계 제패도 바라볼 수 있다. “기업용이 중심인 미국 IT기업 및 삼성전자, 히타치 등과 비교해 소니는 개인용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내년이면 이데이 회장의 선언적인 이 말의 진위여부가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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