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차세대 IT산업에 대한 일본의 추격이 매섭다. 한국과 대만에 밀려 쓸쓸히 퇴장할 것으로 여겨졌던 일본의 평판디스플레이업체들은 최근 공격적인 투자를 앞세워 왕국 재건에 나섰다. 우리가 한 걸음 앞서 갔던 통신서비스산업도 일본 통신·방송사업자들이 차세대 통신·방송 융합서비스를 우리보다 먼저 치고 나올 기세여서 다시 추월당할 위기다. 우리 정부와 업계가 일본을 따돌렸다고 잠깐 손을 놓은 사이 일본이 이처럼 턱 밑까지 쫓아왔다. 더욱이 일본은 통신서비스에서 부품·소재까지 탄탄한 기반이 있다. 평판디스플레이는 반도체, 휴대폰에 이어 우리 IT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으며, 통·방 융합서비스는 우리의 미래 IT비전의 맨 앞줄에 선 개척자다. 전문가들은 이 때문에 “우리도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정부와 업계가 한 마음으로 총력을 기울이는 새로운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IT산업의 성장동력을 총체적으로 재가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방 융합, 기세 올린 일본=일본의 ‘한국 따라잡기’ 기세는 날로 치솟고 있다. 특히 위성DMB와 차세대 초고속망 등 통신·방송 융합서비스에서 우리를 앞지른 것은 일본의 자신감을 더욱 북돋고 있다. 통신·방송계 관계자들은 “통신·방송 융합 선도국의 자리는 격전도 한번 치러보기 전에 일본에 넘겨준 것 아니냐”며 우려를 나타냈다. FTTH는 전송속도 100Mbps가 넘는 차세대 초고속망의 핵심이다. 일본의 FTTH 보급은 2002년 1월 1만2000가입자에서 23만(2003.1), 96만(2004.1), 142만(2004.6) 가입자로 그야말로 급상승세를 보였다. 그래프 참조 위성DMB도 일본이 한 발 앞섰다. 일본 위성DMB사업자인 MBCo의 관계자는 “다음달 4일 기자회견을 하고 10월 중순 본방송 실시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미 방송예정채널의 80% 가량을 실시간 방송으로 내보내 단말기 판매만 없을 뿐 본방송 체제에 사실상 돌입했다. 반면 국내 위성DMB 준비 사업자인 티유미디어는 아직 방송사 자격이 없다. 국내엔 예비면허란 개념이 없어서다. 방송위원회는 다음달 사업자 선정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본방송은 11월 중순이나 12월 초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빙이긴 하지만 ‘세계 최초’의 기록을 일본에 빼앗기게 됐다. 지상파 디지털TV방송과 지상파 DMB에선 앞서지만 낙관만 할 수 없다. 우리는 지상파 디지털TV방송을 일본보다 2년 먼저 시작했지만 지난해 말 광역시 유예로 인해 격차가 좁혀졌다. 일본은 우리의 도청소재지 격인 현청 소재지를 내년 말까지 디지털로 전환할 예정이지만 쇼고현, 도야마현 등이 이를 앞당길 움직임이다. 일본은 NHK 등 지상파방송사 주도로 내년 하반기에 휴대폰 수신 방송을 할 예정이어서 내년 상반기로 잡아놓은 채 아직 확실한 일정을 잡지 못한 우리나라를 맹추격했다. ◇평판디스플레이도 추격권에=한국과 대만에 맥을 못 추던 일본 평판디스플레이 업계가 다시 신발끈을 졸라맸다. 강력한 특허공세와 관세 장벽, 히타치·마쓰시타·도시바의 차세대 LCD 투자 전격 합의 그리고 캐논과 도시바의 SED 사업 진출 등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차세대 LCD 투자는 대형 LCD를 포기할 것이라는 우리 업계의 시각을 무색하게 했다. SED 합작 투자는 시기상조라는 우리 업계를 초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대만 LCD업체들에 기술을 지원해왔던 일본 기업들이 지난해부터 기술 지원을 끊고 있다”고 말했다. 당장 대만 업체에 타격을 주겠지만 그 불똥은 국내업체에 튈 수밖에 없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일본 업체들이 분야별로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서로 자국 부품을 우선 구매하는 국수주의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국내 LCD TV 패널의 주요 수요처였던 마쓰시타, 도시바 등이 차세대 LCD 투자를 진행함으로써 우리 제품의 미래 판로에 먹구름이 끼었다. ◇정부-업계 공동대응 전무=상황이 이렇게 돌변했지만 우리 정부와 업계는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통신·방송융합서비스의 경우 이를 뒷받침할 법·제도 개선을 맡은 국회와 정책당국만 바라보고 있으나 기약이 없다. 평판디스플레이 분야도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의 독자적인 투자만 있을 뿐 업계 공동의 대응은 전무하다시피하다. 정부와 업계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정부가 정책 목표를 설정하면 업계가 적극적으로 따라가던 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정부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 없이 통신방송사업자에게 투자를 독려하고 통신방송사업자는 주주의 눈이 무서워 투자를 꺼리고 정부와 국회 탓만 한다. 정부는 업계가 맘놓고 투자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고, 업계도 위기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개척자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먼저, 일본 정부와 업계가 이처럼 파상적인 공세를 펼치는 메커니즘부터 연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형준·성호철기자@전자신문, hjyoo·hc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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