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셋톱박스 수출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날로 추락하는 수출단가로 셋톱박스 업체의 채산성에 적신호가 켜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표 효자 수출품목이라는 디지털 셋톱박스의 위상도 크게 흔들리고 수출성장률 역시 점차 둔화되는 추세다. 특히 수출단가의 하락요인 중 하나가 국내업체간 과도한 출혈경쟁이라는 지적이 높아 ‘수출규모는 크지만 수익성이 낮다’는 아날로그 셋톱박스의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다.
◇둔화되는 수출성장률=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올 8월까지 국내 셋톱박스 수출규모는 3억6400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작년 동기 대비 29% 정도 증가해 비교적 높은 성장세지만 성장률 면에서는 점차 둔화되고 있다. 진흥회는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당초 계획(35%)보다 낮은 21.1%의 성장률로 올해 총 6억4000만달러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실제로 90년대 초반부터 연평균 50∼100% 정도 성장한 셋톱박스는 지난 2000년을 기점으로 수출성장률이 주춤한 실정이다. 지역별로 보면 올해 8월 누계 기준으로 유럽과 중동지역의 수출비중이 전체의 86%로 가장 높다. 이 중 유럽은 전년 대비 39.2%로 지역 중에서는 가장 성장세가 두드러지지만 최근 위성방송사업자의 도산과 구조조정 등의 영향으로 시장이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금액 기준으로는 수출비중이 가장 큰 중동시장이 13.7% 정도 성장했다. 이 지역은 국내업체간 과당경쟁이 극심해 수출가격이 가장 낮은 지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밖에 북미시장이 지난해에 비해 190.2%로 성장해 유럽과 중동을 대체할 차세대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다.
◇극심한 출혈 가격경쟁=수출성장률이 둔화되는 원인은 방송사업자 경영위기, CAS라이선스 획득의 어려움 등도 있지만 국내업체끼리의 극심한 출혈 가격경쟁도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는 반대로 그만큼 수출을 추진하는 국내업체수가 크게 늘어났음을 뜻한다. 진흥회 집계에 따르면 90년 중반 많아야 30개 미만이었던 수출업체수가 지금은 60∼70개까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수출단가 역시 2001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저급형과 고급형을 망라하고 크게는 60%에서 작게는 10% 하락한 추세다. 가장 흔한 모델인 FTA형의 경우 불과 2년 사이에 공급가격이 절반 이상 하락해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 국내업체가 주력하고 있는 CI형이나 CAS 모델 등 고급 모델도 수출단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업체의 한 관계자는 “해외시장에서 경쟁하다 보면 국내업체끼리 가격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며 “심지어 이미 확정된 공급업체에 저가를 무기로 재계약을 요구하는 경우까지도 있다”고 토로했다.
◇전망과 대책=가격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가격경쟁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수출업체가 늘어나면서 가격경쟁은 불가피한 면도 있다. 문제는 가격 자체가 원가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렇게 형성된 가격이 결국은 제조업체의 ‘채산성 악화’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 가격을 무기로 시장에 진출한 후발업체 역시 당장은 실익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이미 국내에 내로라하는 셋톱 업체는 기대에 못 미치는 낮은 매출과 악화된 채산성 때문에 회사운영에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대표 수출품목으로 성장한 셋톱박스 산업이 대외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가격경쟁 대신에 기술과 품질경쟁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힘을 얻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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