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학에선 그랜저 타는 나이가 한의대생은 30살, 의대는 35살, 공대는 45살, 자연대를 나오면 영원히 못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기업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에게는 이런 얘기가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대기업 A전자 부설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박모씨(37)는 “박사 학위를 받아도 일반 직장인과 비슷한 대우 때문에 일할 맛이 안난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도 임금이지만 언제 감원한파가 몰아닥칠 줄 모르는 불안정한 신분이 더욱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850여명의 연구인력을 갖춘 삼성종합기술원은 최근 핵심 연구인력이 모자라 해외 전문가를 대거 채용했다. IMF 이전만 해도 손꼽을 정도였던 외국계 연구인력은 현재 40여명에 달한다. 인사팀의 한 관계자는 핵심인력 부족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추세여서 올해 말에는 해외 인력이 90여명을 상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가 연구개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업 부설연구소가 연구원들의 사기저하와 고급 인재 수급난으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낮은 임금과 불안한 고용구조는 신규인력이 연구소 취직을 꺼리는 요인에서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심지어 핵심 기술인력이 해외로 떠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핵심인력을 되레 수입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 부설연구소는 1만여개에 달할 만큼 양적으로 급팽창했다. 하지만 실제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연구인력이 크게 부족해 양적 팽창이 질적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박사급 연구인력 300여명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종합기술원의 경우 현재 전자·전기·반도체 등 핵심분야에 미국·인도·러시아 출신 인력이 40여명에 달하며 올해 말에는 90명선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또 LG전자는 국내에서 인재수급이 여의치 않자 러시아나 인도 등지에 현지 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중이다. 비단 대기업뿐 아니다. 대기업보다 대우가 더욱 열악한 벤처기업의 경우 창업멤버를 제외하고는 순수 연구개발에 전념할 박사급 연구인력이 거의 전무한 상태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이하 산기협)가 지난해 전국 989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민간기업 연구개발활동 애로사항’에 관한 조사에서는 응답기업의 60%가 ‘인력확보 및 양성’을 첫번째로 꼽았다. 지난해 정부가 수립한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도 이 같은 문제의식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2006년까지 IT산업 등 미래유망 신기술 분야에서 필요한 인력은 42만9898명인 반면 대졸 양성인력은 22만1903명에 불과해 20만여명이 부족할 것으로 추정됐다.
이처럼 기업 부설연구소를 중심으로 기술인력이 크게 부족한 것은 우선 연구원에 대한 경제적 처우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산기협이 지난 6월에 조사한 ‘산업계 연구원 애로사항’ 설문조사에 따르면 산업계 연구원 사기저하의 주된 요인으로 ‘낮은 대우수준과 불투명한 장래(신분)’를 응답자의 85%가 지적해 소속기업의 대우에 불만을 드러냈다. 실제로 올해 초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이공계 인력공급의 위기와 과제’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대졸 초임기준으로 신용평가사가 3500만원, 금융업종이 2400만∼3000만원인 데 반해 전자 및 IT업종 연구개발 인력은 1800만∼2300만원으로 현격히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낮은 처우도 기술연구인력 부족현상을 야기하는 주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양대 응용화학부 이영무 교수는 “우리나라는 3급 이상 공무원 가운데 기술직 공무원이 9% 밖에 안되는 등 정부나 공무원 사회에서도 기술연구인력을 은연중에 홀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기술연구 인력난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은 정부나 사회의 전향적 인식전환이 없는 이상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 소속기업의 CEO가 기술개발보다는 마케팅이나 경영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거나 성과에 대한 보상(인센티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도 연구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같은 연구인력의 사기저하는 궁극적으로 연구소와 국가 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산기협 기술정책팀 정선훈 과장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의 경우 기술연구인력을 푸대접하면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도 국가경쟁력이 갈수록 퇴조하는 우를 범한 반면 기술연구인력을 우대한 독일이나 프랑스는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며 “산업계 연구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정부 및 기업 등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고급 인력의 연구소 기피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구원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인센티브가 제공돼야 한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에 폐지된 산업계 연구원 소득공제제도 부활이나 과학기술자 공로연금제도 확대시행 등은 범국가 차원에서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업계 차원에서 처우개선 및 재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각종 혜택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양대 이영무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계 기술연구원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라며 “일본 등 선진국이 기술직 공무원의 수를 행정직보다 많이 늘리는 한편 정책결정에도 적극 참여토록 해 사회적 지위를 높였듯이 우리도 기술연구인력을 중시하는데 정부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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