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기업 생태계를 만들고 열린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 그 틀은 정부와 국회가 정책이나 법제 형태로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시장과 사회가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규칙, 규범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열린 생태계를 만들기 위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쟁과 이론, 학문이 발달해왔고 또 여전히 논란 중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동반성장’ ‘공정사회’ ‘공생발전’ 등으로 대변되는 공존의 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경제는 발전하는데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사회안전망 밖으로 밀려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위기감에 정부가 직접 드라이브를 걸겠다며 제시한 어젠다다. “대통령이 대기업 그룹 총수와 중소기업 대표를 잇따라 청와대로 불러 직접 그 배경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한다. 각 부처 공무원들은 먼저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겠다며 기업인들과 전문가들을 이리저리 오라가라하며 연일 회의 중이다. 국회는 전경련 관계자와 대기업 대표들을 참고인으로 출석시켜 호통을 치는가 하면, 관련 법안의 수정 발의를 앞다퉈 낸다. 검찰과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등은 사법권, 규제권을 발동하고 사례 적발에 열을 올린다.” 정부가 공존의 틀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후 얼마되지 않아 벌어진 일들이다. 그 취지는 인정하지만 입법, 사법, 행정 3부가 한꺼번에 몰아붙이는 바람에 기업과 국민들은 되레 혼란스럽기만하다. 극명한 사례가 또하나 있다. 애플과 구글의 역습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IT위기론’이다. “삼성전자가 특허침해로 애플에 피소 당하고 일부 국가에서는 관련 제품 판매가 중단됐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의 파트너였던 구글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가 통합하는 시장환경의 변화에 부응하겠다며 모토로라를 인수, 경쟁자로 탈바꿈했다. 수출 역군이었던 IT기업들이 위험하다는 위기론이 확산되자 해당 부처 담당 관료는 기자들에게 민관 공동 연구개발(R&D)을 통해 ‘국산 모바일 운용체계(OS)’를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피력했다. 한 시간도 채 안돼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발상’이라며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결국 그 관료는 ‘진위가 왜곡됐다’는 해명을 내놓고 사태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정부의 이같은 대응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 사장은 “정부가 국내 논리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면서 “삼성은 글로벌 회사고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공생발전을 내세운 대기업 때리기와 IT위기론을 확대한 삼성전자 흔들기에 대한 억울한 심정을 피력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최 사장은 또 “정부 얘기만 믿고 사업하면 ‘쪽박’ 찬다는 말도 있다”면서 와이브로 개발에 매달리면서 LTE시장 진입이 늦은 경우를 빗대 설명했다. 우리나라 최고 IT기업 수장도 정부의 과도한 정책 드라이브가 낳은 폐해를 직접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는 씁쓸한 토로였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휘트 포드 교수가 정의한 ‘하이 로드(High Road)’라는 개념이 글로벌 경제사회학계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얼마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인사청문회에서 이 개념을 소개하면서 알려졌다. 하이 로드는 한마디로 ‘최소한의 규제가 자율 경쟁을 일으켜 상생의 사회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2007년 6월 포드 교수가 미국 와튼스쿨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처음 발표한 이 개념은 견제와 균형을 위해 국가나 의회가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 보다 구성원들에게 혼과 철학, 열정을 강조하는 문화가 확산돼 사회적 신뢰가 쌓이면 그 결과 높은 균형 사회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미국은 견제와 균형을 중시하면서 우선적으로 제도화에 무게를 둔다. 반면 덴마크와 네덜란드 같은 선진화된 복지국가에서는 선의와 도덕성, 그리고 자율적인 규제를 중시한다는 게 포드 교수의 설명이다. 박 장관은 청문회 당시 이 개념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하이 로드’와 ‘로 로드(Low Road)’로 구분했다. 로 로드는 하이 로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법과 규정에 따라 적발과 처벌을 강조하는 사회를 말한다. 진정성에서 우러나는 ‘높은 길(high road)’은 자율적인 상생 풍토로 이어지지만, 마지못해 따르는 ‘낮은 길(low road)‘은 오래가기 어렵고 둘러가는 편법도 나타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부가 시장에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해 규제를 만들 수는 없다. 또 세부적인 규제를 만든다고해서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제재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포드 교수의 하이 로드 접근방법은 결국 강제적인 규제나 정책보다는 스스로 만들어낸 규범, 규칙들이 시장에 더 많은 활력을 불어넣고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철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 대학가와 벤처업계 사이에서 프라이머라는 벤처인큐베이팅 기업이 단연 화제다. 성공한 벤처 1세대들이 모여 후배 벤처인들을 양성하자며 만든 공동 투자기업이다. 특이한 것은 이 기업의 핵심 업무는 자금 투입이 아니고 멘토링이다. 창업의 아이디어만 가진 대학생이나 초기 스타트업 기업들을 발굴해 그간의 창업 노하우를 전수하고 CEO로서의 경험을 공유한다. 싹이 있는 유망한 기업들은 자금도 투자해 성년의 벤처로 키워내고, 기업공개까지도 연결해줄 계획이다. 정부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 어떤 강압적인 규제도 없었지만 스스로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벤처업계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 이택경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건강한 벤처 생태계는 정부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강력한 규제를 내놓아도 시장이 그 계획대로 움직인 적이 있나요? 창업자들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자금보다도 정보와 경험, 함께 고민해주는 멘토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열정, 더 좋은 기업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기 위한 기업가정신 이런 것들이 공유되는 생태계야 말로 우리가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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