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가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에서 퇴출되고 있다. 1982년 소니와 필립스가 개발한 콤팩트 디스크는 잡음 없는 고음질 매체란 장점을 내세워 오디오 시장의 왕좌를 차지했지만 지난 몇 년 새 MP3를 비롯한 디지털 다운로드 음악의 성장세에 형편없이 밀리고 있다. 이제는 CD의 마지막 자존심인 음질 우위마저 다운로드 서비스에 빼앗기면서 오디오 시장은 새로운 판 짜기가 불가피해졌다. “우리 회사는 내년 1월 1일부터 CD플레이어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 지난주 영국의 한 오디오 회사가 발표한 뉴스는 세계 오디오 업계를 술렁이게 했다. 영국의 린 프로덕트는 창사 이래 독특한 철학과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고품격 하이파이 오디오 기기를 제조하면서 명성을 쌓아왔다. 지난 1972년 출시한 턴테이블 ‘손덱 LP-12’는 지금도 변함없이 생산되며 각국의 아날로그 오디오 마니아의 사랑을 받는 명기다. 린 프로덕트는 유명 오디오 회사 최초로 다음 달부터 CD플레이어 생산을 중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품질 음원소스로서 CD의 가치가 퇴조하는 상황에서 1000만원대를 호가하는 최고급 CD플레이어를 생산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다. 실제로 이 회사의 고급 CD플레이어 판매는 연간 40%씩 급감하는 반면에 스트리밍 방식의 디지털 음악재생기기(DSP:Digital Stream Player)는 인기가 치솟고 있다. 린 프로덕트가 CDP의 다음 타자로 주력하는 DSP는 대용량 디지털 저장장치에 수백, 수천장의 CD 음원을 음질 손상 없이 저장한다. 또 온라인에서 클래식 마스터링 원음파일을 내려받아서 원하는 곡을 언제라도 쉽게 골라 재생할 수 있다. 린 프로덕트는 DSP가 CD플레이어보다 훨씬 편리하고 음질도 우월한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하이파이 음원기기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DSP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음질을 재생하며 멋진 외관에 대용량 저장장치를 갖췄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존 아이팟과 기능 면에서 완전히 동일하다. 린 프로덕트는 차별화된 고품질 음원을 갈망하는 오디오 마니아들을 위해서 아이팟의 하이파이 버전을 만든 셈이다. ◇CD의 성장과 몰락=린의 CD플레이어 단종은 CD가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에서도 옛 시대의 유물로 밀려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지난 1982년 소니와 필립스가 공동 개발한 CD는 처음부터 음반시장에서 레코드, 카세트 테이프를 대체하는 용도로 탄생했다. 지름이 12㎝인 CD는 작은 원반이라는 뜻의 콤팩트 디스크라고 불렸고 음반시장을 급속도로 장악했다. CD는 지직거리는 레코드판, 잡음 많은 카세트 테이프와 전혀 다른 청명한 디지털 음악 세계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CD는 초기규격을 만들 때 결정적 실수를 저질렀다. 당시 소니는 세계적 지휘자 카라얀에게 CD의 녹음시간을 자문한 결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녹음에 필요한 74분으로 정했다. 엔지니어들은 CD 녹음시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오리지날 음악신호 중에서 사람이 듣지 못하는 고역주파수(20㎑ 이상) 대역을 커트했다. 그러나 훗날 음향학자들의 연구결과 사람의 귀가 감지하는 가청영역은 최고 100㎑에 이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제는 초창기 CD가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에서 ‘천박한 매체’로 배척당하는 원인이 됐다. 오디오 마니아들은 CD 음악이 깨끗하지만 왠지 차갑고 부자연스럽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비록 잡음이 섞이긴 해도 완벽한 주파수대역을 커버하는 레코드음반이 CD보다 제대로 된 음악을 전해준다는 주장이다. 일부 음악 애호가들은 CD로 완벽한 음질을 추구하고자 최신 디지털 오디오 기기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지만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디지털 오디오는 아무리 값이 비싸도 한 해만 지나면 신제품이 쏟아져 금방 구형물건이 되기 때문이다. CD 음악의 한계에 실망한 오디오 마니아들이 LP 음악으로 다시 전향한 덕택에 레코드 유통시장은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오디오업계는 CD의 음질 한계를 극복하고자 새로운 오디오 포맷을 개발했다. 인간의 가청영역을 모두 커버하는 슈퍼오디오CD(SACD)와 DVD오디오 등이 나왔지만 이미 대중화된 CD 시장에서 고음질만 추구하는 별종들은 거의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세상이 바뀌며 디지털 음원이 CD시장을 압도하는 시대가 왔다. IT업계 관점에서 음악이란 온라인 전송이 가능한 디지털 콘텐츠일 뿐이고 굳이 CD포맷에 담아서 유통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 CD의 음반 시장 점유율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반면에 디지털 음악 다운로드는 급증하고 있다. 2003년 이후 전국에서 타워레코드를 포함한 3000여개 레코드가게가 문을 닫았다. 또 2005년에는 온라인 음악시장이 CD로 대표되는 오프라인 시장을 역전시켰고 격차는 매년 벌어지고 있다. 올해는 디지털 음원판매가 3000억원을 넘어서고 CD 판매량은 600억원 남짓한 수준에 머물 전망이다. 불법 다운로드로 인한 폐해는 심각하지만 가수가 저렴한 비용으로 음반을 발표하고 소비자는 편리하게 온라인을 거쳐 음악을 듣는 음반시장의 디지털 음원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과거 음반시장에서 카세트 테이프, 레코드와 같이 CD도 마이너 리그로 밀려나고 있다. ◇디지털 다운로드 음악, 원음에 도전하다=디지털 다운로드 음악은 편리성뿐만 아니라 음질 면에서도 CD를 따라잡고 있다. 네오위즈벅스의 음악포털 벅스(www.bugs.co.kr)는 국내 최초로 CD 음질과 동일한 ‘원음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원음이란 음악 CD에서 음질 손실 없이 추출한 파일로 MP3의 최고품질인 320Kbps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음질을 제공한다. 원음 파일은 무손실 압축포맷인 FLAC과 WAV 두 가지 형태로 제공된다. 기존 고객들은 추가비용 없이 한 번 구매로 MP3 및 원음파일(FLAC, WAV)을 모두 다운로드할 수 있다. 한번 내려받은 원음파일은 평생 소유가 가능하다. 벅스의 이번 조치는 국내 디지털 음원 시장의 고음질 경쟁을 부추기고 결국 CD 시장에 큰 타격을 줄 전망이다. 이론적으로 MP3보다 고음질의 음악을 즐기기 위해 CD를 구매할 필요성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려받은 원음파일을 DA컨버터를 거쳐 하이파이 오디오에 연결하면 CD와 똑같은 음악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적 클래식 음반회사들은 급감하는 CD 판매를 대신해서 음반제작에 사용하는 마스터링 테이프를 온라인에서 스트리밍 서비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CD처럼 초고역대가 잘리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당시의 완벽한 음질이 온라인에서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음악 애호가로서는 전 세계에서 최고급 음악파일을 다운로드해 간편하게 즐기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디지털 다운로드 음악은 CD 수준을 뛰어넘어 하이파이 오디오의 스탠더드 음원으로 미리 점찍었다. 이제는 IT업계도 포스트 CD시대의 하이파이 오디오 트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 디지털 음악을 고품질로 즐기려는 소비자 욕구가 새로운 시장수요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PC와 하이파이 오디오의 합성어인 PC파이(PC+HiFi)다. PC파이는 CD플레이어나 턴테이블 대신에 PC를 음원소스로 활용하는 오디오 시스템을 지칭한다. 다양한 음악을 PC 하드디스크에 저장 관리하면서 편리하게 재생하는 장점이 있다. 수준급의 오디오 마니아들도 PC의 USB포트에 외장형 DAC를 연결해 고급 오디오를 감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PC가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거실의 웅장한 오디오 기기에 아이팟, 노트북PC를 연결한 모양새는 다소 민망하다. 오디오는 성인들이 즐기는 장난감이다. 성인이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는 청소년과는 다른 형태의 장난감이 필요하다. 여기에 숨겨진 틈새시장이 있다. 벽장 가득 들어찬 CD 앨범을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고 재생할 때 PC보다 조작이 간편하고 음질이 뛰어난 ‘21세기 전축’이 나올 시점이 왔다. 온라인 음악콘텐츠가 아무리 다양해지고 음질이 좋아져도 싸구려 PC스피커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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