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 킨슬러(Francis Kinsler, 한국명 權世烈)는 1929년에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약 100여 만 명의 저소득층 불우(근로)아동과 청소년들을 교육하고 있는 성경구락부를 창설한 선교사이다.
그는 1904년 1월 13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5년에 메리빌 대학을 1928년에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프린스턴신학교 재학 중 미국을 방문한 당시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 매큔(G. S. McCune)의 권유를 받고 한국선교사가 되었다.𠍘년 10월 4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24살의 청년 킨슬러는 한국에 왔다. 그는 평양선교부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부터 1936년까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1931년부터 1970년까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신약학 교수로 강의하였다. 그는 영어, 헬라어, 한국어에 능통하였으며, 약혼녀를 불러 선교지 평양에서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성경구락부를 창설하게 된 것은 한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29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그는 평양거리에서 방황하는 소년 6명을 데려다가 평양 광문서점 2층에서 따스하게 위로하며 기도해 주고 재워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소년들은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모여서 킨슬러 목사의 기도를 받았다. 이 일이 뜻있는 목회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을 얻게 되어 1929년 평양 연화동 장로교회에서 불우청소년 교육을 위한 “개척구락부(Pionier Club)”를 발족하게 되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서점의 2층 방이 아이들로 가득 찼다. 몰려오는 아이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킨슬러는 평양노회에서 운영하는 성경학교 건물 사용을 허락받았다. 그 해 가을에는 아이들의 숫자가 300명을 넘었다.
기대 이상의 결과를 확인한 그는 이 활동을 평양시내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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