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업체가 가전산업에 뛰어든 지 벌써 한 세대(30년)가 지났다. TV·휴대폰 등 숱한 글로벌 히트 제품을 만들었지만 가전 분야는 여전히 고전 중이다. 그러나 최근 1위 제품 후광 효과, 국내 브랜드 상승과 맞물려 세계 시장에서 토종 가전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여기에 경기 불황으로 다른 글로벌 경쟁 업체가 고전하면서 시장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국내 업체도 가전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보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 중인 국내 업체 위상을 소개하고 ‘글로벌 넘버1’을 위해 넘어야 할 과제와 현안을 집중 점검해 본다. #지난 9월 초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가전·멀티미디어 전시회 ‘IFA 2009’.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현지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생활가전을 글로벌 1위에 올려 놓겠다”고 장담했다. 글로벌 시장 수위를 달리는 휴대폰·TV와 달리 아직은 변방에 있는 삼성 가전 사업 위상을 놓고 볼 때 다소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최 사장은 “미국에서 냉장고 매출이 70%, 세탁기는 140% 늘었다”며 특유의 자신감을 내비쳤다. 가전 1위를 위한 비전은 곧바로 실행으로 이어졌다. 생활가전 소속이었던 에어컨을 TV 사업에 맡겼다. TV에서 경험한 1등 노하우를 에어컨에 접목하겠다는 의도였다. # LG전자 올 상반기 실적 공개 결과 TV·휴대폰에 비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했지만 가전 부문은 내심 쾌재를 질렀다. 상반기 영업이익에서 글로벌 가전 1위 ‘월풀’을 제쳤기 때문이다. 영업이익 3억8600만달러로 월풀 3억달러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렸다. 영업이익에서 월풀을 제치기는 처음이었다. 비결은 하나였다. 바로 제품 차별화였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최근 세계경영연구원 주최로 열린 CEO 대상 강연회에서 “가전 사업을 삼성과 똑같이, 월풀과 똑같이 한다면 이길 방법이 없다”며 “시장 통찰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 웅진코웨이는 3분기까지 누적 매출 1조원을 넘겼다. 지난 2006년부터 연간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섰지만 3분기 만에 ‘1조 벽’을 깨기는 처음이다. 규모의 경제로 경쟁력을 배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이에 앞서 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은 올해를 글로벌 시장 진출 원년으로 선언했다. 브랜드도 ‘코웨이’로 모두 통일했다. 홍 사장은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고 생활 수준이 높은 유럽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환경 가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일렉트로룩스·밀레·지멘스 등을 제치고 1위에 오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틈새 시장에 불과했던 환경 가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확신한 것이다. ◇‘1등 노하우. 차별화. 새로운 시장’=찬밥 신세였던 ‘코리아 가전’이 세 가지 키워드를 앞세워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한 물간 산업으로 취급받던 백색가전에서 가능성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백색가전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배경은 먼저 1등 노하우 때문이다. 국내 업체는 가전 메인시장으로 불리는 TV에서 확실한 독주 체제를 굳혔다. 삼성은 2006년 이후 시장 1위 자리를 한 번도 놓치지 않고 있으며 LG전자도 올해 규모 면에서 소니를 제치는 등 파죽지세로 영토를 넓히는 중이다. 전자업계에서는 지금도 “TV시장을 장악한 회사가 가전시장의 주도권을 준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TV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소니가 ‘전자 왕국’으로 군림했던 것도 세계 TV시장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는 TV 1등 경험을 산업 구조가 비슷한 가전 분야에 응용하면 에어컨·냉장고·세탁기 등에서도 글로벌 1등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윤부근 삼성전자 사장은 “TV에서 이룬 1등 노하우를 가전 분야에 접목하면 충분히 승산 있는 게임”이라며 “착실한 준비 작업을 거쳐 앞으로 2년 내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서도 이제는 TV뿐 아니라 에어컨도 기대하겠다는 말이 벌써 나오고 있다”며 “1등 DNA를 에어컨에 심겠다”고 장담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최악의 시장 환경도 국내 업체에 기회로 작용했다. 세계 가전시장을 주도하는 월풀·일렉트로룩스·지멘스와 정면승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국내 업체와 경쟁 관계에 있는 대다수 글로벌 업체는 시장에 찬바람이 불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경기 침체에 따른 매출 감소로 인력 감축, 생산 공장 철수와 같은 구조조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월풀은 이미 전 세계 생산 거점을 조정 중이다. 5개 공장을 폐쇄하고 5000명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일렉트로룩스는 4분기에 3100명을 줄였으며 일시적이지만 설비 가동을 중단했다. 이 뿐이 아니다. 세계적인 소형 가전업체 피셔&파클(Fisher & Pakle), 슬로베니아의 기반을 둔 유럽 최대 가전 업체의 하나인 고렌에(Gorenje) 등은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고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다. 반대로 국내 업체는 지난 기간 세계 시장에서 갈고 닦은 생산과 마케팅 노하우가 서서히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LG전자가 월풀 영업이익을 제친 데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LG전자의 가전 생산 본거지인 창원공장은 20년 가까운 혁신 개선을 통해 ‘군살빼기’를 진행해 왔다. 월풀·일렉트로룩스가 미국·유럽 등에 생산기지를 집중한데 반해 LG는 창원공장을 중심으로 생산 거점을 재편했다. 이 결과 원가와 품질 경쟁력을 확보한 창원 공장에서 전체 매출 대비 50% 정도를 올리면서 시장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프리미엄을 중심으로 제품 경쟁력도 몰라볼 정도로 높아졌다. 더 이상 삼성·LG 브랜드는 제품 구색과 소비자를 위한 값싼 ‘미끼’가 아니다. 삼성은 미국 시장에서 수요 감소에도 프리미엄 제품인 프렌치 도어 방식 냉장고 점유율이 금액 기준으로 2008년 21.8%에서 올해 5월 누계 기준으로 28.0%까지 치솟았다. 드럼세탁기도 2008년 12.0%에서 올해 5월 누계 기준 19.3%까지 성장했다. 소비자기관 평가도 잇따르면서 미국 ‘굿 하우스키핑’지는 지난 4월호에 최고 드럼세탁기로 삼성 제품을 선정했다. LG전자 드럼세탁기도 이미 ‘글로벌 톱’ 수준에 올랐다. 경쟁업체 대비 차별화한 스팀 기능, 대용량, 사용 편의성을 갖춘 제품 경쟁력으로 미국·중동·아시아 등에서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수익 효자상품으로 자리잡았다. 떠오르는 차세대 가전도 국내 업체에 블루 오션이다. 가장 주목할 신천지가 바로 환경가전이다. 제니스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대부분의 가전시장이 마이너스 신장했지만 환경 오염 우려와 알레르기 등 각종 바이러스 질환을 가진 사람이 늘면서 환경가전 시장만큼은 쑥쑥 커 나가고 있다. 전 세계에서 시장 규모가 큰 유럽의 경우 환경가전은 지난 2년 동안 25%나 늘었으며 앞으로 성장률이 더 가파를 전망이다. 환경가전에 발빠르게 진출한 웅진코웨이는 해외 매출에서만 지난해 446억원에 이어 2011년 400% 성장한 1500억원을 낙관할 정도로 시장 석권을 자신하고 있다. 홍준기 웅진코웨이 사장은 “TV·휴대폰 등에서 국내업체가 축적한 1등 노하우, 프리미엄 제품을 중심으로 한 차별화 전략, 여기에 환경가전 등 새로운 시장을 선점해 나간다면 세계 가전 시장에서 국내 브랜드가 최고 반열에 오를 날도 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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