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에 대한 조사
. 다산의 생애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38)6월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오늘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서 9대를 연달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들어간 명문집안,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자(小字)는 귀농(歸農), 자(字)는 미용(美鏞) 또는 송보(松甫), 호는 다산(茶山).사암(俟庵), 당호는 여유당(與揄堂), 시호는 문도(文度), 본관은 압해(押海 羅州)정씨다.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고산(叩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며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로 유명한 공제(恭齊)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다산의 일생은 삼기(三期)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22세때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18년간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다가 40세(1801)때 신유사옥으로 강진에 유배될 때까지의 득의시절이요, 제2기는 18년가의 적거시절로서 그의 나이 58세까지요, 제3기는 해배후 임종까지의 18년간 유유자적하던 말면에 속한다.
어려서 부친에게 경사를 배우며 탁월한 재질을 소유한 다산은 7세때의 시에 “작은산이 큰산을 가리는 것은 거리가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다”라는 오언시를 지어 부친이 이를 기특하게 여기었고, 경사고문(經史古文)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시율(詩律)로도 칭찬을 받았던 재동(才童)이었다. 1776년 (영조52) 다산의 나이 15세되던 해에 부친을 따라 남인의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다음 해에 이가환 및 매부 이승훈을 통하여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그의 학문에 깊이 공감하여 드디어 그를 사숙하게 되었고 이에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다. 22세 때인 2월에 감시(監試) 경의과(經義科) 초시에 합격하고, 4월에는 회시(會試) 생원(生員)에 합격하였는데 다산의 답안지가 훌륭하여 정조(正祖) 임금의 눈에 띄어 선정전(宣政殿)에서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와의 풍운지회가 이루어졌고,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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