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그룹은 10년간 전자 부품·소재·장비 사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했다. 과감한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5개의 계열사를 거느렸지만 성적표는 초라하다. 휘닉스PDE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적자가 이어졌다. 에스티에스반도체통신도 3분기에 영업적자로 돌아섰다. 지난해 인수한 코아로직은 첫해부터 적자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BKLCD를 제외한 대부분 계열사의 사정이 어렵다. 오너 일가인 홍석현 회장이 삼성코닝정밀유리 지분 7.32%를 보유해 얻는 지분법 평가익 1400억원과 비교하면 사업 성과는 더욱 초라하다. 그룹조차 회의감이 짙은 이유다. 지난 1990년대말부터 부품·소재 사업에 진출한 중견 그룹사들에 대한 평가가 다소 부정적이다. 매출 규모가 조 단위에 이르는 데다 전통산업인 섬유·화학 업종의 중견 그룹사들로선 손쉽게 진입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보광 그룹 관계자는 “지금으로선 안정적인 생존이 우선”이라며 “당분간 과거처럼 적극적인 투자가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코오롱·효성·한솔·두산 등 반도체·디스플레이용 소재 사업에 일찌감치 발을 디딘 회사들도 최근 회의론에 휘말렸다. 코오롱은 올 들어 SKC와 합작으로 폴리이미드(PI) 필름 사업을 떼어냈다. 광학필름 사업의 진로도 불투명하다. 두산(전자)의 광학필름 사업도 아직 삼성·LG 등 국내 고객사에 진입하지 못했다. 인쇄회로기판(PCB)용 동박(CCL) 사업도 정체다. 한솔LCD는 올해 매출 1조원대를 바라보며 한솔제지와 함께 외형상 한솔의 양대 주력 계열사지만 그룹내 평가는 차갑다. 주력인 TV용 백라이트유닛(BLU) 사업은 박한 마진구조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위탁가공업이다. 효성은 올 들어 10여개 전자 부품·소재 기업들을 인수하며 적극적이지만 아직은 이렇다할 성과를 장담하기 이르다. 화승인더스트리도 화학 사업에서 벗어나 최근 디스플레이용 필름 시장 진출을 선언했지만 대규모 양산 공급은 불투명하다. “화학·섬유 등 전통 산업은 제품 사이클이 뚜렷해 지속적인 원가 경쟁력만 확보하면 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IT 산업은 시스템과 디바이스의 교체 주기가 워낙 빠르다. 막대한 투자를 통해 기술을 개발하고, 양산해도 선발 주자가 한참 앞서 가 원가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동양종합금융증권 황규원 연구원의 지적이다. 전통 산업에 익숙했던 의사결정 구조와 비즈니스 논리가 IT 시장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LG라는 우산을 쓰지 않으면 초기 시장 진입도 어렵다. 제일모직·LG화학이 지금처럼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것도 이른바 ‘캡티브 마켓’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지수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원은 “두 회사의 경우 초기 시장 진입때 그룹내 관계사의 전략 파트너로 공동 연구개발에 참여했으며, 구매 물량을 일정 정도 보장받으면서 기술·양산 경쟁력을 키워올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투자 규모도 중견 그룹사가 감당하기엔 벅차다. 핵심 원천 기술도 없으니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도 ‘추격자’ 지위를 벗어나기 힘들다. 황 연구원은 “지난 10년동안 한두개 기업이라도 성공한 사례를 보여주지 못했다”라면서 “결국 두가지 핵심 역량인 마케팅력과 기술력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갖춘 회사가 드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LG에 국한되긴 하지만 IT 부품·소재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의 역할을 낙관하는 시각도 있다. 제일모직의 자회사이자 편광필름 업체인 에이스디지텍에 대해 나재영 동부증권 연구원은 “당장 엄청난 실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삼성전자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파트너로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며 “일본 업체와 비교해도 상당한 기술력을 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 연구원도 “LG화학이 전자재료 사업에서 지금 두자릿수의 이익율을 내는 것은 세계 시장서도 드문 일”이라며 “대만계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과 극히 대조적”이라고 지적했다. 중견 그룹들이 사양길에 접어든 부품·소재 사업에서 철수하거나 전통 산업에서 아예 IT 부품·소재 기업으로 과감하게 변신하는 것도 고민해야할 시점이다. 최근 시장 성숙기에 이른 반도체·LCD 관련 사업보다 차세대 성장 사업에 집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태양광 소재 사업에 일찌감치 뛰어든 동양제철화학그룹이 적절한 사례다. 세계 실물경기 위축 속에 유망한 국내외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올랐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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