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군사쿠데타의 두 모델
우리 나라에서 61년에 군사쿠데타라는 제도가 수입되었으니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게 늦은 편은 아니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대략 50년대 중반부터 군사쿠데타가 시작되었다. 물론 우리 나라에서 군사쿠데타의 원조는 육사 2기의 박정희와 육사 8기의 김종필이다. 이 쿠데타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은 육사 11기의 전두환과 노태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네 사람은 한국현대정치사의 군사쿠데타 부문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쿠데타를 실행한 방식은 매우 다르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 일단의 ‘은인자중하던’ 군인들은 61년 5월 16일 새벽에 장교 250 여명, 사병 3,500 여명의 병력으로 한강을 넘어 서울로 전격 진군하여 중앙청, 육군본부, 중앙방송국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한 다음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혁명공약’은 “반공을 제일의 국시로 하며 실질적인 반공태세를 강화시킴.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함.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민족정기를 진작시킴. 절망과 기아선상의 민생고 해결과 국가자주경제를 재건시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함. 조속한 시일내에 민정이양 후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함” 등이었다.
이때 반도호텔에 머물고 있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 소식을 듣고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피신해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고, 내각제 하에서 실권없는 윤보선 대통령은 공관으로 들이닥친 쿠데타군 앞에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해 한국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이런저런 의혹을 샀다. 민주당이 신구파로 나뉘어 갈등하다가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분당된 상황에서 신파 출신의 총리에게서 소외되어 있던 구파 출신의 대통령이 쿠데타군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다. 실제로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후에도 장면 총리와 국무위원들이 국무회의를 열어 군사쿠데타를 승인하도록 하는 등 쿠데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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