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의 다섯 가지 형식 이원조, 유진오, 김남천이 작가의 주관이나 사상 여하에 관계없는 세부 관찰과 묘사의 문학을 리얼리즘이라 하고, 이것이야말로 ‘사실의 세기’라 불리는 전형기에 대처할 수 있는 최상의 방식이라 주장하는 것과 그들이 깊이 관여했던 부르주아 저널리즘의 속성은 무관하지 않다. 전형기를 맞이하면서 부르주아 저널리즘은 계층 이익과 명분론의 균형 상실에 직면한 것인데, 위기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다. 부르주아 저널리즘의 존립 자체의 무너짐을 눈앞에 둔 문학의 존립 방식을 묻는 일, 또 다르게는 시민 문학과 사회주의 문학이 동시에 균형감을 상실해가는 상황을 눈앞에 둔 문학의 존립방식을 묻는 일, 그것이 리얼리즘론이었다. 이 논의 속에 은폐되어 있는 본질은, 부르주아 저널리즘이라는 가면 속에 놓여 있는 한 민족의 생존방식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문학에서는 이를 리얼리즘이라 불렀지만 실상은 ‘어떻게 사느냐’의 과제였던 것이다. 리얼리즘이 현실주의로 번역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1) 김남천의 경우 부르주아 저널리즘이 균형감각을 잃게 되면 될수록 김남천의 리얼리즘론은 한계에 닿게 된다. 1942년의 시점에서 그는 소설의 운명에서 내세웠던 리얼리즘론을 스스로 부정한다. 일제강점기에 쓴 김남천의 우리말로 된 마지막 작품인 「등불」에서 뽑은 위의 대목들에는 작가이자 생활인으로서의 태도가 비교적 솔직히 드러나 있다. 작가로서의 그와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지아비인 생활인으로서의 그가 그 사이에서 균형감각을 확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생활에 기울어지면 문학을 포기해야 하고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라면 해답은 하나이다. 나는 살고 싶다는 것. 이는 나는 죽고 싶다와 동격이 아닐 수 없다. 산다는 것은 문학 포기를 가리킴이며 죽는 다는 것은 생활 포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 둘의 가운데 놓인 기괴한 모양의 작품이 일문으로 쓴 「어떤 아침」이라 할 것이다.2) 유진오의 경우 현실이 어떠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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