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고다이묘(守護大名)와 센코코다이묘(戰國大名)의 차이점-슈고다이묘(守護大名)와 센코코다이묘(戰國大名)의 차이점을 알기전 알아두기- 1324년과 1331년에 고다이고(後醍 )천황이 벌인 막부타도운동을 계기로하여, 무사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 닛타 요시타카(新田義貞)도 막부에 반기를 들고 호죠(北條)씨일족을 공격하여 1333년 카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타카우지가 무가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1336년 쿄토조정을 공격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 요시노(吉野)로 도망갔다. 이후 1392년까지 타카우지가 세운 쿄토의 천황(北朝)과 요시노의 천황(南朝)이 병존하여,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50여년의 쟁란기를 남북조시대라 한다. 북조의 타카우지는 켄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본을 정하고 1338년 세이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정치가 부활했다. 3대장군 요시미츠(義滿)때에 남북조가 통일되고(1392), 막부기구가 정비되었다. 막부는 장군 밑에 정무를 총괄하는 3인의 칸래이(管領)를 두고, 그 밑에 카마쿠라시대이래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등의 지배기구를 두었다. 지방에는 슈고를 설치하고 관동에 카마쿠라부(鎌倉府), 구주에 큐슈탐제(九州探題)등을 두었다. 요시미츠는 막부를 쿄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두었으므로, 이 아시카가씨의 막부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 불리운다. - 슈고다이묘(守護大名)의 성립 - 남북조시대에 막부는 슈고(守護)에게 군사·경비권외에 연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수호는 장원을 지배하고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가 되었다. 1)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막부보다 쇼군과 무사의 결속이 약해 유력한 슈고(守護)는 토지를 넓히고 무력을 키워, 그 지역을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되었는데 이렇게 영주로 변한 강력한 수호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한다. 유력한 슈고다이묘는 관래이(管領)와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막부는 수고다이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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