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저녁 6시 반 바이에른 국경을 넘으면 곧 나타나는 브라우나우 암인 이라는 거리의 초라한 여인숙 가슈트호프 줌 폼메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의 시초, 그저 평범한 일개 청년이었던 시절의 히틀러에게는 이 도이취어를 사용하는 두 국민사이에 국경이 있을 수 없고 쌍방이 모두 한 나라에 속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감정은 극히 강하고 영속적인 것이었으며 나의 투쟁 이란 그의 책의 첫머리에 그 표면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에와서 생각해 보면 운명이 나의 출생지로 부라우남우 암 인을 택한 것은 나에게 신의 섭리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 조금한 거리는 두 개의 도이취국가 사이의 경계선위에 있으며 적어도 우리 젊은 세대는 자기 수중에 있는 일체의 수단을 다해서 이것을 다시금 결합시킬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국경에 있는 이거리가 나에게는 위대한 사명의 상징처럼 생각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육촌동생으로 그와 결혼하려면 교회의 특별한 면허를 받아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생활은 가난에 쪼들린 빈가들과 대부분의 농민들은 무뚝뚝한 고집쟁이가 보통이었고 히틀러의 경우와마찬가지로 근친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사생아가 많았다. 아돌프가 6살 때 린츠 남서에 있는 피슈르항 촌의 공립소학교에 입학한후 4,5년동안 이곳 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의 10세의 기억으로는 주소가 익곱번 바뀌고 다섯곳의 다른학교를 다녔다. 11세때 아돌프는 린츠 중학교에 보내어 졌다. 이것은 아버지 에겐 재정적인 부담을 안겨주었으며 관리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의 꿈은 예술가였다. 그런걸로 아버지와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아돌프의 아버지는 1903년 아침산보를 하다가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 죽었다. 그후 그의 어머니는 생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16세의 아돌프는 그런 어머니를 도울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그의 생애중 가장 달콤하고 평화스런 기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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