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공찬전(薛公瓚傳)〉 국문본의 현대역 설공찬이 예전에 순창(淳昌)에서 살던 설충란(薛忠蘭)이는 지극한 가문의 사람이었다. 매우 부유하더니 한 딸이 있어 서방 맞았으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일찍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공찬(公瓚)이고 아이 때 이름은 숙동이라고 하였다. 어릴 때부터 글공부하기를 즐겨 한문과 문장 제법을 매우 즐겨 읽고 글쓰기를 아주 잘하였다. 갑자년에 나이 스물인데도 장가를 들지 않고 있더니 병들어 죽었다. 공찬의 아버지는 불쌍히 여겨 신주(神主)를 만들어 두고 조석으로 매일 울면서 제사 지내었다. 병인년에 삼년상을 마치자 아버지 설충란이 조카딸 더러 이르되, “즉은 아들이 장가도 들지 않아서 죽어 그 신주를 먹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묻어야겠다.” 하고, 하루는 (신주를) 멀리 싸두었다가 그 무덤 곁에 묻고 많이 서러워 이레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서러워하였다. 설충란의 동생의 이름은 설충수(薛忠壽)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공침(公琛)이고 아이 때 이름은 업종이었는데 ‘셔으 ’(서울 )서 업살고 있었다. 그 동생의 이름은 업동이니 순창에서 살았다. 공침이는 젊었을 때부터 글을 힘써 배우되 동생의 반만도 못하고 글쓰기도 그만 못하였다. 정덕(正德) 무신년(무진년의 잘못된 표기, 1508년) 7월 20일에 공침이 충수의 집에 올 때 였다. 그 집에 있던 아이가 행금가지 잎을 당기더니 고운 계집이 공중에서 내려와 춤추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매우 놀라 제 집으로 겨우 들어가니 이윽고 충수의 집에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보니, 공침이 뒷간에 갔다가 병을 얻어 땅에 엎드려 있다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지만 기운이 미쳐버리고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고 하였다. 설충수는 그 때 마침 시골에 가 있었는데 종이 즉시 이 사실을 아뢰자 충수가 울고 올라와 보니, 공침의 병이 더욱 깊어 그지없이 서러워하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뇨 ” 하고 공침이더러 물으니, 잠잠하고 누워서 대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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