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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4)잉태기-해방시대


카테고리 : 레포트 > 기타
파일이름 :080204111746_.jpg
문서분량 : 1 page 등록인 : etnews
문서뷰어 : 뷰어없음 등록/수정일 : 08.02.01 / 08.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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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설명
[전자산업 50년, 새로운 50년](4)잉태기-해방시대
본문일부/목차
‘해방, 정부수립, 한국전쟁, 자유당 독재….’
 1945년부터 10여년간 한국 사회에 일대 변혁을 몰고 온 대사건들이다. 사회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말 그대로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평균 전력은 고작 8만㎾ 수준. 공장용은커녕 가정에서도 전기의 태부족 사태가 빈번했다. 한국 전자산업이 해방 후 15년이 지난 1959년에서야 태동하게 된 계기다. 하지만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확인됐다.
 ◇정부 주도의 전자산업 육성=‘전기·통신산업의 계획적 육성, 통신기기의 보급 확대 그리고 민간방송국의 잇따른 개국.’ 해방 직후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 우리나라 전자산업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특히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발족한 상공부 전기국은 전기공업 육성을 위한 법률안을 마련하는 등 견인차 구실을 담당했다. 민간기업들의 단합과 품질 향상을 위한 전기업공업통제협회(한국전기공업협동조합 전신) 출범도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상공부의 전신인 미군정청 상무부도 나름 큰 역할을 했다. 1945년 9월 언더우드 대령의 감독 아래 일본인이 세웠던 적산기업들을 운영할 관리자를 선임했고 공장을 가동할 발전설비와 수배전설비의 점검에도 나섰다. 사실상 산업 기반을 닦는 중요한 몫을 한 것이다.
 ◇20개 전기공업기업 등장=상공부가 1948년 12월 미 군정청 상무부로부터 넘겨받은 전기공업 분야 직할 관리기업은 모두 20개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수십여개의 소규모 기업이 있기는 했지만 그 규모나 역할로 볼 때 이들은 한국의 전기공업을 대표하던 기업이다. 이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던 회사는 인천에 생산공장이 있던 조선도시바전업. 전동기와 변압기 등을 생산한 이 회사는 해방 후 회사이름을 조선도시바전기로 바꾸고 초대 대표로 나중에 소설가이자 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주요한씨를 선임했다. 조선도시바전기는 1950년 서상록(전 이천전기 회장)씨가 인수해 이천전기공업으로 바뀌었다. 서상록씨는 해방 전부터 일본에 나고야이천공업을 비롯, 이천방직 등 3∼4개 기업을 운영하며 당시 전기공업계에서는 상당한 재력가로 통했다.
 나머지 19개 회사도 유사한 과정을 거쳐 정부 수립과 함께 민간에 넘어갔다. 민간에 불하되기까지 이들 기업들은 사장 격인 관리인 외에도 공장장 격인 기술담당을 따로 두고 있었는데 기술담당 출신으로서 유명해진 사람 중 한 명이 1965년 오리온전기를 창업한 이근배씨다.
 ◇국내 자본 회사도 속속 등장=1946년 전남 광주에서 심만택씨가 세운 호남전기공업(로케트전기)이 국내 자본으로 만든 최초의 기업이다. 또, 전차전동기용 권선전문 건전사(명도원, 이하 설립자), 변압기제작과 수리전문회사를 내세운 국제전기(강경식), 주상변압기를 생산하는 한광전기(조계철) 등도 각각 등장했다. 1947년에는 축전지 전문 조선축전지(정낙은·홍순복)도 출범했다.
 1950년 한국전쟁은 남한 내 전력 수급량을 20%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설상가상으로 전기공업 시설도 대거 파괴됐다. 전쟁기간 중 전력사정이 악화되자 동해와 서해상에 떠 있던 미군 소속의 화이트호스호 및 임피던스호 등 발전함의 신세를 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피폐한 전기공업 시설의 복구는 전쟁 직후인 1954년부터 기존 업체의 재건 형태로 이뤄졌다. 전기공업 분야의 재건운동은 이후 계속됐다. 이는 동시에 전기공업의 미래를 이끌 최첨단 기술 분야로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고 학생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직장 1순위였다. 전기학교가 설립됐으며 대한전선·이천전기 등 유명 업체의 입사시험에 대졸 지원자들이 몰렸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이천전기는 1958년 당시로는 초유의 대졸사원 공채시험을 실시해 성가를 높이기도 했다.
 ◇기술과 고급인력 한계=해방 후 1950년대까지도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했거나 축적한 전기기술 분야는 전혀 없다시피 했다. 전기 관련 인력 역시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초급기술자나 단순 숙련공에 불과했다. 생산시설은 있었지만 이를 가동할 능력이나 기술이 없었다. 설계도를 읽어낼 기술자도 없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자재난도 심각했다. 변압기나 전동기는 규소강판 대신 철판을 사용, 터지고 새는 일이 많았고 이는 국산 전기제품의 불신 풍조로 이어졌다.
 이 같은 상황에서 희소식도 들렸다. 1950년대 말 이천전기가 고급 인력의 채용과 함께 미국 국제협력국(ICA)의 차관으로 현대식 생산시설을 마련하고 자체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해 195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22KV급 변압기와 370KV급 전동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앞서 신생기업인 이화전공사도 1958년 고효율의 자동전압조정기를 자체 개발했다. 특히 이 기술은 창업주인 배수윤씨가 체신부에서 무선전신전화건설국 기사로 근무하던 중 자동전압조정기의 필요성을 느껴오던 터에 미국산 조정기를 역분석하는 방법으로 기술을 터득, 국산제품을 개발해낸 것이었다. 이 회사의 자동전압조정기는 이듬해인 1959년 상공부가 주최한 제1회 발명품전시회에서 상공부장관상의 영광을 안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라디오 시대
 상업방송 확산은 라디오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라디오방송은 경성중앙방송 외에 16개 지방방송국이 있을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당시 남한에만 부산·대전·대구·광주·춘천·청주·마산·이리·목포 9곳. 북측에도 평양·원산·신의주 등 7곳이 분포했다. 여기에 강릉·개성 등 4곳에는 이동방송중계소 또는 간이방송소가 있었다. 이처럼 상업방송이 크게 확산한 데에는 1945년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이 한몫했다. 라디오의 동시성과 속보성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며 방송을 향한 관심이 고조된 것이다. 이 덕분에 당시 일본인을 제외한 우리나라 사람이 보유한 라디오는 7만여대 수준에 불과했으나 2년 후인 1947년 8월에는 두 배 이상인 18만5000대까지 늘었다.
 1950년대 초까지 라디오 보급은 조선방송협회가 담당했다. 협회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서울 정동에 일본 와다진공관제작소와 기술 제휴로 월 5000대 규모의 진공관 재생공장을 설립했다.
 협회는 해방 후 라디오 보급 확대의 일환으로 조선전기산업주식회사를 세워 라디오 보수와 진공관 재생업무에 나섰다. 특히 1948년 미국에서 라디오부품 도입이 원활해지면서는 수신기 수리도 하는 등 영역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수요도 크게 늘어나자 조선전기는 진공관만을 재생하는 범아전자공업을 세웠다. 범아전자는 이후 세를 계속 확대해 나갔지만 한국전쟁 중에 공장시설이 완전히 파괴돼 폐업했다.
 라디오 보급 확대로 방송의 질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1947년 4월 서울중앙방송은 프로그램 사전심의제를 시행했다. 실황중계도 크게 늘었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의 서울 입성식을 비롯, 같은 날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본 항복 조인식 등이 전화선을 통해 중계됐다. 10월에는 수원에서 열린 전국축구대회가 실황으로 라디오를 탔다. 1947년 9월 3일은 우리나라 방송사에 기록될 만한 역사적 뉴스가 타전된 날이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리고 있던 국제무선통신회의에서 한국에 호출부호 ‘HL’을 할당한 것. 이에 따라 그해 10월부터는 서울중앙방송의 호출부호가 일본식(JODK)에서 HLKA로 바뀌었다.
 라디오방송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전쟁통에 상당수 방송사가 파괴됐으나 서울중앙방송은 대구·부산 등을 옮겨다니며 방송을 지속, 대국민 선무 활동에 지대한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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