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의 한 유명 음식점에는 ‘고객은 무조건 옳습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국물이 짜든, 고기가 질기든 손님의 요구사항에 무조건 맞추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공급자보다 수요자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태도는 비단 음식장사 뿐만 아니라 차세대 로봇산업의 성공에도 필수적이다. 지능형 로봇사업에 뛰어든 회사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기술력, 자금부족보다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팔릴 것인가 방향성의 문제다. 대부분 중소 로봇회사들은 고객들이 로봇에 대해서 어떤 욕구를 갖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나름대로 아이디어에만 의존해서 지능형 로봇개발에 착수한다. 현존하지 않는 자동화 수요를 겨냥해 로봇제품을 개발하기 때문에 고객들의 반응을 미리 예측하기도 난감하다. 마치 적군의 매복 가능성이 높은 낯선 지형에 아군 병사들을 무작정 밀어 넣는 꼴이다. 당연히 실제 수요자의 수요와 반응을 고려하지 못한 첨단로봇제품은 기대에 못미치는 썰렁한 시장반응에 직면하게 된다. “누가 이런 로봇을 만들어 달랬나.” “디자인은 왜 저 모양이야” “소음이 너무 커서 잠도 못자겠네” 고객들의 깐깐한 지적 앞에 많은 지능형 로봇들이 일찌감치 상용화를 포기하고 전시장에서만 맴돌다 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리스크를 지기 싫은 로봇제조사들은 그나마 수요가 확실한 청소로봇, 보안로봇시장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지능형 로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면 수요자의 성향과 욕구를 가능한 정확히 이해하는 작업이 우선되야 한다. 예컨데 로봇을 만드는 사람도 방향을 잘 모를 때는 고객한테 직접 물어보거나 개발과정에 수요자를 직접 참여시키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중에서 고객과 함께 제품을 개발하는 전략을 수요창출형 연구개발(R&D)이라고 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컨셉트와 디자인, 기능에 맞춰서 개발하기 때문에 제품의 만족도는 높아지고 생산 이후 마케팅의 문제도 쉽게 극복하는 장점이 있다. 고객이 주도하는 수요창출형 R&D는 아직 실체가 모호한 지능형 로봇, 특히 공공부문의 로봇수요 창출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 미리 수요처를 확보한 상태에서 로봇제품을 개발하기 때문에 로봇R&D에 따른 불필요한 리스크를 줄이고 낭비요소도 없앨 수 있다. 산자부와 정통부는 올들어 로봇R&D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로봇수요를 조기에 창출하기 위해 ‘수요창출형 R&D’에 맞춘 사업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산자부=지난달 28일 안양시 한국석유공사에서는 사회안전로봇의 공동개발을 위한 로봇수요처와 로봇제조사간의 MOU협약식이 있었다. 산자부가 주도한 이날 행사에서 눈에 띄는 점은 사회안전로봇의 수요처인 석유공사·한국전력·한국수력원자력·한국가스공사 등 4개 공기업이 각각의 사용목적에 따른 로봇사양을 설계하고 중소로봇업체와 공동개발의 부담을 지기로 한 점이다. 중소로봇업체들은 개발 첫단계부터 요구성능이 제시되고 든든한 수요처가 정해지는 만큼 투자부담을 크게 줄이고 안정적 매출을 확보하는 장점이 있다. 산자부는 또 안산의 로봇종합지원센터를 통해 중소로봇업체의 지능형로봇에 대해 시장검증비용을 지원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육용 로봇의 경우 수요처인 대학교, 고등학교가 직접 성능을 테스트하고 개선점을 지적하기 때문에 수요창출형 R&D의 범주에 포함된다. 중소기업 입장에서 새로운 로봇을 공공기관, 대기업과 공동개발하면 해외진출시에도 높은 신뢰성을 담보하게 된다. 산자부는 이와 같은 수요창출형 R&D모델을 교육로봇, 실버로봇, 국방로봇, 건설로봇 등 여타 로봇분야로 적극 확산할 계획이다. △정통부=수요자 위주의 로봇R&D정책은 정통부도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올해 정통부의 제 2기 국민로봇사업은 새로운 로봇비즈니스 모델의 수요처를 대폭 포함시킨 것이 특징이다. 지난해 실시된 제 1기 국민로봇사업이 100만원대 국민로봇 기반의 시범서비스에 촛점을 맞췄다면 제 2기 국민로봇 사업은 다양한 로봇비즈니스 모델을 발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는 로봇플랫폼 제조사 외에 KT와 한국몬테소리, 금성출판사 등 통신 및 콘텐츠기업이 대거 국민로봇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오상록 정통부 로봇PM은 “네트워크 로봇을 통해서 콘텐츠, 통신매출을 올리는 기업들이 직접 참여할수록 로봇 비즈니스모델의 성공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말했다. 정통부는 교육부 산하의 한국교육학술정보연구원과 제휴해서 URC로봇의 교육용 버전을 준비하는 한편 한국 U시티 협회와 빌트인 로봇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교육현장과 대규모 아파트단지에 로봇제품을 공급하려면 초기 컨셉구상부터 수요처와 협의하는게 가장 빠른 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로봇산업도 지난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수요창출형 R&D전략의 중요성을 최근에야 인식해가는 추세다. 공급자의 머리 속에서 상상하는 로봇수요보다 직접 제품개발에 참여하는 능동적 소비자(프로슈머)가 지능형 로봇시장을 리드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본래 로봇제품을 만든 개발자와 쓰는 소비자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시각차가 엄연히 존재한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첨단 실버로봇이 아무리 안마를 잘하더라도 정작 노인들은 사소한 감성적 이유로 왠지 쓰기 싫다며 배척할 수도 있다. 로봇이 진정 인간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라면 로봇을 쓰는 인간이 어떤 감성과 욕망을 갖췄는지부터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객은 차세대 로봇시장을 여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다.
◆인터뷰-이호길 로봇종합지원센터장 “우리나라의 로봇R&D전략도 기술개발보다 산업화에 더 비중을 둘 때가 왔습니다.” 이호길 로봇종합지원센터장(54)은 그동안 정부가 주도해온 로봇R&D정책도 수요자 위주로 전환하는 터닝포인트에 도달했다고 강조한다. 올들어 산자부와 정통부의 로봇R&D전략이 일제히 수요자 중심으로 바뀐 것도 이제는 지능형 로봇의 개발단계를 넘어 상용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라는 것. “정부가 지능형 로봇육성에 처음 관심을 보이던 2003년만 해도 기술적 준비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봇제조에 필요한 각종 기술요소가 어느 정도 갖춰져 제품상용화와 수요창출에 코드를 맞출 여건이 됩니다” 그는 로봇분야에서 수요창출형 R&D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은 국방로봇이라고 주장한다. 국방부가 군요구성능(ROC)을 충족시키는 무인로봇장비를 요구하듯이 여타 지능형 로봇제품도 수요자가 명확한 스펙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 “청소로봇처럼 수요자가 평범한 개인일 경우에는 기업체가 알아서 좋은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회보안로봇처럼 공공성이 있는 로봇제품은 수요처와 제조사가 공동으로 상용화를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이웃 일본이 지난해부터 차세대 로봇분야에서 수요창출형 R&D정책을 속속 도입한 상황에서 한국도 대응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그간 지능형 로봇의 R&D사업에 적잖은 정부예산을 쓰고도 상용화 실적이 부진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봇R&D도 기초 기술개발이 아니라 수요창출형 R&D로 무게중심이 옮겨짐에 따라 소비자 기호에 맞는 로봇상품이 쏟아질 시기가 되었습니다.” 배일한기자@전자신문, bai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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